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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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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이영춘-겨울새들의 편지 겨울새들의 편지 어느 시인은 아픈 동생의 몸이 겨울처럼 깊어진다는 소식이고 한 시대를 풍미하던 여배우는 자신의 딸도 몰라본다는 기사가 문풍지를 흔드는 아침이다 은행 앞에서 푸성귀 팔던 할머니는 한겨울은 다가오는데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며 풀잎처럼 고개 떨구고 두 손끝 호호 분다 오십 대 중반 퇴직한 후배는 학교 앞 골목길에서 밥장사하다가 월세 낼 벌이도 안 돼 보증금만 날린 채 가게 문을 닫고 가게 문처럼 덜컹거리는 심장을 앞세우고 기러기로 떠돌고 있는데 보도블록은 말없이 귀를 세우고 비밀의 통로인 양 세상 이야기들을 삼키고 있다 리어카 사과 장수는 간밤에 사과가 다 얼었다며 사과 같은 두 볼을 쓸어내리는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한쪽 귀 닫고 감- 감- 아득한 나라 저편, 아득한 달 속에서..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조창환-쥐를 물고 가는 뱀 쥐를 물고 가는 뱀 쥐를 물고 가는 뱀을 만났습니다 돌로 쳐 죽일까 하다가 그냥 놓아 주었습니다 저 목숨도 살려고 하는 짓인데 싶어 그리 한 줄 아시겠지만 아니올시다, 내 목숨 편히 살고 싶어 그리했습니다 시인 권달웅이 소싯적에 개구리를 물고 가는 뱀을 만나 물푸레나무 작대기로 내리쳐 때려죽였다가 찔레 덤불에 길게 축 늘어졌던 그놈이 밤이면 살아서 세모 대가리를 쳐들고 꿈틀거리며 기어들어와 혓바늘을 날름거리며 독 있는 천남성 열매 같은 눈을 뜨고 노려보더라* 하고 말한 생각이 나서 그리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어쩝니까? 꿈마다 뱀이 나타나 고맙다고 머리 조아릴 줄 알았는데 어럽쇼? 뱀은 안 나타나고 쥐가 나타나 단추 구멍 같은 눈에 눈물 글썽거리며 나를 빤히 노려보지 뭡니까? 인정머리 없는 인간아 불쌍한 ..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이기철 - 보내주신 별을 잘 받았습니다 보내주신 별을 잘 받았습니다 닷새째 추위 지나 오늘은 날이 따뜻합니다 하늘이 낯을 씻은 듯 파랗고 나뭇잎이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소풍 나오려 합니다 긴 소매 아우터를 빨아놓고 흰 티를 갈아입어 봅니다 거울을 닦아야 지은 죄가 잘 보일까요? 새 노래를 공으로 듣는 것도 죄라면 죄겠지요 외롭다고 더러 백지에 써보았던 시간들이 쌓여 돌무더기 위에 새똥이 마르고 있네요 저리 깨끗한 새똥이라면 봉지에 싸 당신께 보내고 싶은 마음 굴뚝입니다 적막을 끓여 솥밥을 지으면 숟가락에 봄 향내가 묻겠습니다 조혼의 나무들이 아이들을 거느리고 소풍 나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 오늘은 씀바귀나물의 식구가 늘어났습니다 내 아무리 몸을 씻고 손을 닦아도 나무의 식사에는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밤이 되니 쌀알을 뿌린 듯 하늘이 희게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