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당/2020년 가을호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김태실 - A4-16

알 수 없는 사용자 2020. 12. 24. 16:36

A4-16

 

 

백지로 돌아가기, 어렵지 않아요

여행용 가방에 들어가 몇 시간 몸을 숨기면

조용히 하얀 종이로 변하지요

숨구멍을 짓누르는 무릎의 힘을 받아도

흰 구름으로 바뀌곤 해요

그동안 입었던 옷과 신발

그동안 만났던 인연과 사랑이

한 장의 종이가 되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백지에 심장을 찍는 일은 너무 어려워요

사진처럼 붉은 삶을 찍어 놓기에는,

남은 자들의 기억에 화인처럼

펄펄 끓는 쇠의 온도를 새기는 일은 힘들어요

우리가 기억 될까요

기억이 세상을 바꿀까요

세상의 억울한 죽음은 사라질까요

당신의 눈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우리는

누군가의 간절한 그리움입니다, 그 간절함은

같은 이유하나로 백지로 떠나요

싱그러운 나뭇잎에 통곡을 실은

소리 없는 울음이 바람에 실려 옵니다

물컹한 글씨가 새겨집니다

 

* 1. 9살 의붓아들을 여행용 가방에 7시간동안 가둬 숨지게 한 사건(2020, 6. 한국)

* 2. 비무장 상태의 흑인남성을 경찰이 무릎으로 목을 눌러 죽게 한 사건(2020, 5. 미국)

 

 

 

 

김태실 | 2004년 『한국문인』 수필, 2010년 계간 『문파』 시 등단. 시집 『그가 거기에』, 수필집『그가 말하네』 등. 한국문인협회 이사. 계간 『문파』 편집위원. 제7회 월간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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