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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홍유리 - 코로나 이후의 삶, <퍼펙트 센스>가 말하는 최후의 감각

영화 <퍼펙트 센스> 中

2020년은 코로나19라는 신종 바이러스와 함께 시작되었다. 공격적인 감염력을 갖고 있는 이 바이러스는 전 세계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선진국들의 방역 체계도 속절없이 무너졌다. 국지전을 제외하고 오랜 기간 평화의 시기를 유지해오던 대다수의 국가들이 총칼과 포탄 대신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적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지리멸렬한 시간 속에 사람들은 이와 같은 위기를 인류가 어떻게 견뎌왔는지 알고자 했다. 카뮈의 『페스트』가 다시 베스트셀러가 되고, <컨테이젼>(2011), <감기>(2013) 등이 감염병 영화들의 역주행을 이끌었다. 
우리는 오랜 시간동안 이와 같은 미지의 적에 대한 공포심을 드러내왔다. 영화에서 등장한 대표적인 사례는 조지 로메르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을 필두로 꾸준히 제작되어 온 좀비물이다.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의해 온 세상이 ‘살아있는 시체들’로 뒤덮이는 좀비 영화들은 빠르고 강력한 감염, 국가통제와 사회질서의 붕괴, 타인에 대한 경계와 불신을 그린다. ‘공포’라는 감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장르가 그렇듯 이러한 유형의 영화들에는 ‘억압된 것의 회귀’에 대한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다. 과학 기술과 합리적 이성에 대한 맹신,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 인한 무한 경쟁 등 우리의 족적이 분명히 잘못되었음을, 그리고 그로 인해 지금은 알지 못하고, 그렇기에 더욱 두려운 무언가로 되돌아 올 것이라는 두려움 말이다. 

 

왼쪽 : 영화 <버드박스> , 오른쪽 : 영화 <눈 먼 자들의 도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감염병은 좀 더 다양한 상상력으로 영화 속에 변주된다. 주목할 만한 경향은 <눈 먼 자들의 도시>(2008), <퍼펙트 센스>(2011), <버드 박스>(2018)와 같이 정체불명의 존재에 감염되어 감각을 상실하게 된다는 설정이다.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시력을 잃기 시작한다.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는 사람은 지적이진 않지만 다정하고 살뜰한 평범한 여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여인의 박식한 안과 의사 남편은 초반부터 시력을 잃는다. <버드 박스>에서 사람들은 (영화 끝까지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어떤 존재를 바라보는 순간 눈동자가 기괴하게 변질된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정신병원을 탈출한 자들은 감염되지 않는다. 볼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이들은 무질서한 사회에서나마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인간의 눈’이 대변해온 이성, 과학, 남성 중심의 근대적 세계관, 그리고 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이들 영화 전반에 유령처럼 떠돌아다닌다. 
이 영화들에서 발병 원인이나 적의 정체 등은 구체화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인류에게 닥친 불가항력의 위기로 문명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 있는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며 어떠한 양상으로 드러나는가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노출되는 취약함,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어두운 욕망, 그러나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존엄이 공존한다. 좀비들로 가득 찬 세상에 홀로 남게 되는 비극적 결말의 영화들도 있지만 살아남은 자들과의 희미한 연결고리를 제시하는 희망적 결말을 추구하는 영화들이 다수이다. 이 글에서 주목하는 <퍼펙트 센스>의 결말은 희망을 제시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 희망의 본질이 무엇인가, 즉 다른 이들과의 연결고리를 가능케 하는 핵심이 무엇인가를 시사한다.  
이 영화의 구성은 세 가지 층위에서 이루어진다. 후각, 미각, 청각, 시각을 잃는 과정을 네 단계로 나눈 메인플롯, 전염병 전문의 수잔과 요리사 마이클의 사랑이야기로 구성된 서브플롯이다. 또 다른 서브 플롯은 영상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염병과 사랑의 이야기를 다루는 다이제틱 영상과 일상을 담는 다큐멘터리 영상(과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촬영된 영상)으로 교차된다. 

어둠과 빛이 있다. 남자와 여자가 있다. 음식이 있고 레스토랑이 있다. 질병, 직업, 교통.. 우리가 잘 아는 일상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같은 세상이다.

영화는 평범한 삶의 스케치와 수잔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전염병 연구원 수잔은 후각을 잃은 환자를 진단하게 된다. 이미 영국에서 100명이 넘는 환자가 발생했고 세계 각국에서 이와 동일한 사례가 접수된다. 그러나 이 모든 환자들은 지난 24시간 내에 갑작스레 보고된 사례이며 공통된 감염경로를 갖고 있지 않다. 특이점이라면 이들 모두 후각을 상실하기 전에 지독한 슬픔을 겪는다는 것이다. 헤어진 연인, 고인이 된 친구, 상처를 준 사람들, 오랜 동안 잊었고, 있으려 했던 모든 것들을 떠올리며 오열한 후 바로 후각 잃게 된다. 후각이 기억과 연결되어 있는 만큼 사람들은 냄새와 직관적으로 연결된 추억들을 영원히 잃어가기 시작한다. 
전염병 연구원인 수잔과 향과 맛에 유난히 민감한 요리사 마이클에게도 이 상황은 불가항력일 뿐이다. 인류 전체가 후각을 잃은 뒤 마이클의 레스토랑은 깊은 비관에 빠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먹을 것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음식은 점점 자극적이고 달콤하게 변하지만 후각 없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적응일 뿐이다. 단지 그 와중에서도 사랑에 냉소적이었던 그들이 운명처럼 서로에게 이끌리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의 불가항력이었다. 침통한 비극 속에서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발견하는 기적을 경험한다.

 

영화 <퍼펙트 센스> 中


후각 없는 삶에 적응해가던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극심한 공포와 절망, 공허함을 경험한 후 주체할 수 없는 식욕으로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면 자신의 미각이 사라진 것을 깨닫는다. 커다란 공황상태를 겪은 사람들은 다시 일터로 돌아가고 후각과 미각의 빈자리는 다른 감각으로 채워진다. 수잔은 기약 없는 바이러스 연구를 지속하고 마이클은 후각과 미각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요리한다. 맛과 향이 아닌 질감, 씹는 소리, 농도와 밀도로 음식이 평가된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소리에 민감하게 귀 기울이게 되고 다양한 소리를 통해 더 큰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적응이 완료되기도 전에 또 다른 위기가 발생한다. 갑작스러운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로 인해 폭동이 일어나고 세상은 더욱 극심한 혼돈에 빠져든다. 결국 질병관리본부는 사람들을 격리시키기 시작한다. 청력을 잃은 사람들은 ‘귀가 안 들리세요? 집에서 나오지 마세요. 그곳에 가장 안전합니다.’라는 텔레비전 자막 방송에만 의지한 채 자신의 집에서 고립된다. 끔찍한 적막으로 뒤덮인 세상은 서로 들을 수 없고, 들으려 하지 않고, 그렇기에 더욱 공격적으로 변해간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둘로 나뉜다. 종말이 왔다 믿으며 약탈과 도발을 일삼는 사람들, 그리고 삶이 어떻게든 지속될 거라 믿으며 일상을 지속하는 사람들. 수잔은 다시 처음부터 연구를 시작하고, 마이클은 오색찬란한 요리를 선보이며, 사람들은 스피커의 진동으로 음악을 듣는다.
이쯤 되면 영화의 세 가지 구성 층위가 가리키는 바는 명확해진다. 감각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우리가 삶을 형성하고 지속시켜온 과정에서 억압해온 인간 본연의 것들이다. 증상의 폭발은 그것을 어떻게 잃었고, 얼마나 잊었는지를 극단적으로 상기시킨 후 완전한 소멸로 이어진다. 관계맺음에 냉소적인 마이클과 수잔의 만남은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고립된 섬으로 살아 갈 수 없음을 가리킨다. 두 사람이 나누는 몸의 대화들은 우리의 연결이 좀 더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깊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서로 바라보고, 대화하고, 만지고, 안는 인간 육체의 만남이 우리 연결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극영화 영상과 다큐멘터리 영상의 교차는 지금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이 허구의 이야기가 결국 실제 우리의 삶을 대변하는 상징적 표현임을 강조한다. 과장되고 극단적인 설정을 통해 감정적 환기를 이루고 곧이어 일상의 스케치를 교차함으로써 이를 우리의 실제적 삶 속에서 반추해보길 독려한다.


이제 남은 것은 시각이다. 사람들은 담담하게 현실을 기다린다. 어떤 사람은 시력이 사라진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비한다. 어떤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현실을 살아낸다. 일상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에 충만해하며 감사한다. 서로를 얼싸안고 쓰다듬는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를 즐기며 타인을 느끼기 위해 점점 그 물리적 거리를 좁혀간다. 이렇듯 시각 상실 전의 증상은 기쁨이다. 지금 현재 여기에 살아있다는 것, 그래서 서로를 보듬을 수 있다는 그 소중함에 대한 감사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력을 잃어가는 수잔과 마이클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향해 달려가고 두 손이 맞닿게 되는 순간, 암흑의 상태를 맞이한다. 

 

영화 : <퍼펙트 센스> 中

이제 암흑뿐이다. 하지만 서로의 숨결을 느낀다. 그리고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안다. 키스한다. 서로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느낀다. 누군가 그들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평범한 연인으로 보일 것이다.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고 몸을 가까이한다. 눈을 감고 그들을 둘러싼 세상을 의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삶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시각을 잃은 후 세상은 오로지 촉각만 남은 상태이다. 서로 보지도, 듣지도, 냄새 맡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서로를 만지고 끌어안는 것 외에 중요한 것은 없다. 인간의 모든 주요 감각을 잃었음에도 수잔의 마지막 내레이션에 절망이 없는 것은 이 촉각이라는 감각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잔과 마이클의 포옹은 다른 감염병 영화의 희망적 결말이 시사하는 다른 생존자와의 연결과 다름없다. 우리가 영유해온 삶은 우리의 욕심 안에서 문화라는 이름으로 규정되어온 것일 뿐 영원불변의 것도 아니며 절대적 가치도 아닐 것이다. 이 영화의 엔딩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의 일부로서 우연의 연속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거대하고 끊임없는 변화에 묵묵히 적응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이행하며 살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기 위해 서로를 부둥켜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일지 모른다.
얼마 전 질병관리본부는 코로나19 이후의 삶은 그 이전의 삶과 결코 같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인간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오랜 시간 지구에 가해온 행위는 더 위생적이고 더 깨끗한 환경을 추구하는 것에 일조했다. 간단한 생활수칙의 변화와 화학약품의 사용만으로도 소중한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감기는 해를 거듭할수록 독해지고 수 십 년 주기로 등장하던 변종 바이러스는 몇 년 단위로 주기를 단축하고 있다. 기침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겁이 나고 모르는 사람들과는 대화를 단절한다. 가까운 사이와도 접촉이 꺼려지고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도 불안하다. 물리적 접촉의 회피는 심적 거리에 영향을 준다. 급속도로 확산하는 감염병 방지를 위해 사력을 다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시민의식이 얼마나 위대한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세계를 휩쓸고 지나간 후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머지않아 이 지독한 바이러스는 그 명을 다할 것이고 우리의 일상은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때 이 영화의 메시지처럼 서로의 긴밀한 연결이 우리 생존의 방법이자 이유라는 것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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