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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1년 여름호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수필마당] 이흥수-보름달

보름달

 

지친 하루해가 소리 없이 사위어간다. 땅거미가 지는 저녁나절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다. 덩달아 바쁜 마음으로 아파트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다 잠시 숨을 돌린다. 무심코 올려다 본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는 휘영청 보름달이 훤하게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얼마만인가, 전염병으로 오래 동안 갇혀 지내느라 마음 놓고 밤하늘을 볼 수 있는 여유도 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보름달을 보고 나도 모르게 가벼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60년대 중반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객지 생활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외삼촌댁에 기숙하여 주거는 안정되었지만 서투른 교내 생활과 처음 겪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학교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먼 통학 길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해 질 녘 터덜터덜 집으로 가는 길은 두고 온 가족들 생각에 그날따라 마음이 몹시 울적했다. 한참을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걷다가 유난히 주위가 밝다는 느낌에 사방을 둘러보았다. 저만치서 둥근달이 환하게 웃으며 동행하고 있었다. 갑자기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를 받는 순간 얼핏 오늘이 보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가는 마음이 급해졌다.


집으로 돌아오자 얼른 3월 달력을 들춰 보았다. 틀림없는 음력 보름이었다. 봄 햇살에 언 땅이 녹아 파릇한 새싹들이 쑥쑥 고개를 내밀고 여기저기 봄꽃들이 앞다투어 피면 생일이다. 어머니는 미역국과 평소에 좋아하는 몇 가지 반찬을 마련하여 온 가족이 축하해 주었다. 언제나 어머니는 많은 가족들의 생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조촐하게라도 기억해 주셨다. 낯익은 골목과 그리운 집 보고 싶은 가족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올해도 어머니께서는 틀림없이 맏딸의 생일을 기억하시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챙겨주지 못해 아쉬워하실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햇병아리 대학 생활과 생일에 대한 이야기를 수필 ‘잊어버린 날’이라는 제목으로 대학교 학보사에 기고했다. 첫 수필이 실린 신문을 받은 날 어머니께 모처럼 긴 편지를 드렸다.


어두운 세상 구석구석을 차별 없이 밝혀주는 보름달을 마주하면 늘 감사하고 왠지 모를 친근감이 든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수많은 사연과 비밀을 간직하고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보름달은 사람들이 숨김없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민을 호소하며 간절한 소망을 빌어 본다. 때로는 보고 싶은 얼굴을 떠올리며 애타게 그리운 안부를 묻는다. 손이 닿지 않는 멀리 어디쯤에 있어도 진심이 전달되리라는 믿음에 마음의 문을 연다. 보름달은 수많은 사람들의 얼룩진 눈물을 닦아주고 애틋한 사랑을 응원하며 새로운 희망의 속삭임에 언제나 환한 미소로 용기를 북돋아 준다.

 

가끔씩 오묘하고 신비한 보름달이 때때로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초승달에서 차츰 상현달로 커다랗게 둥근 보름달로 차올랐다가 서서히 줄어 하현달과 그믐달로 비우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채워야 할 때와 비워야 할 때를 알고 실천하는 달의 모습은 우리에게 무언의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의 삶도 모자람에서 채우는 삶에만 익숙해지기보다 조금씩 비워가는 삶의 연습도 필요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오늘도 의연한 모습으로 선명하게 떠오른 보름달을 보며 끝없는 욕심을 버리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원해 본다.

 

 

 

 

이흥수 |2014년 계간 『문파』 수필부문 등단. 수필집 『소중한 나날』. 용인시 창작지원금 수혜. 문파문학 운영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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