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처음 온 짐승처럼
설사는 급하고 화장실은 보이지 않고
지옥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다급할까
지옥에서 오는 길이 이렇게 몸서리칠까
허리는 뒤틀리고 다리는 꼬이는데
문득 밟히는 개똥 한 무더기!
아, 이 똥의 주인은 이미 해탈했겠구나
온몸이 괄약근이 되어
전생의 업까지 깨끗이 비웠겠구나
말아 올린 꼬리 밑으로
지옥의 입구를 환히 드러내놓고
사거리 빨강신호등 아래를 유유히 건넜겠구나
무단으로 건넜겠구나
보란 듯이 보란 듯이 불법不法뿐인 세상을
똥개처럼 개똥처럼 건넜겠구나
불법佛法으로 건넜겠구나
도대체 나는 지구의 어디에 쭈그리고 앉아야
맘껏 나를 쏟아버릴 수 있을까
신발에 튄 나를 가로수 밑동에 스윽 문대고는
저 횡단보도를 무단으로 건널 수 있을까
무단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똥을 한 번도 참아본 적이 없는 짐승처럼
김남호 | 2005년 『시작』 등단. 시집 『고래의 편두통』 『두근거리는 북쪽』 『고단한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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