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당/2020년 여름호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이병률 - 면역

알 수 없는 사용자 2020. 12. 24. 11:13

면역

 

 

서로 가까이도 말며

말하지도 말라며

신(神)은 인간에게 채찍 대신 마스크를 나눠주었다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였을까

입을 가만히 두라는 뜻이었을까

 

소리를 들리게 하지도 말며

소리를 내지도 말라며

사람들을 향해 사람들은 두 번째 손가락을 세웠다

 

서로 얼굴을 비벼도 안 되고

국경은 넘으면 안 되고

잔재미들을 치워놓으라 했다

 

나눠 먹을 수 없으니 혼자 먹을 쌀을 씻었다

서로 떨어져 있으라는 신호에 재조립해야 하는 건 사람이었다

 

마스크 안에서는 동물의 냄새가 났다

어떤 신호 같은 것으로 체한 사람들이

집 바깥으로 나가기를 참아야했던 시절

 

몇 백 년에 한 번

사랑에 대해 생각하라고

신이 인간의 입을 막아 왔다

 

계절이 사라진 그해에는 일제히 칠흑 속에 꽃이 피었다

공기에 공기를 섞어봤자 시절은 시들어갔다

사람들은 자신이 쓴 마스크를 태우면서 혀를 씻었다

 

마음의 손님들을 생각하다 손님들을 돌려보내고

머리에 파고 들어온 이 무언가를 잘 기억하자고

창궐하는 생각들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병률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바람의 사생활』 『찬란』 『바다는 잘 있습니다』 등. 현대시학 작품상, 발견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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