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당/2021년 봄호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신두호 - 해변이 나타나는 사람

알 수 없는 사용자 2021. 3. 23. 15:34

 

해변이 나타나는 사람

 

 

 

선을 보여주려 하는 사람에게는 점의 세계가 남아 있다
내려다보면 어디든 발밑의 그곳엔 모래 뿐
발목에서 한 사람이 시작되려 할 때
모래는 점이 되어 그려지지 않은 선들을 기다린다

 

모든 것들이 이곳에서는 점으로 보이니
더 이상 나뉘지 않는 몸이란 하나의 세계
주어진 재료와 도구로 선을 만들어 내려면
정교하게 빚어진 성이란 얼마나 충격에 취약한지

 

직접 만들어 보면 안다고 한 사람은 생각한다
두 다리로 모래 위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을 것만 같다
다리와 다리가 교차하는 그러한 행위에 더 이상
부끄러움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선을 보여주려는 한 사람은 모래 위에 앉아 그려 본다
모래뿐인 공터를 백사장이라고 부르면
백사장을 이루고 있던 것들이 자신에게 떠오른다
몇 개의 빛나는 삽과 푸른 빛깔의 바스켓들이

 

점이었던 선들을 한데 불러 모으고 있다
직선은 가장 빠른 길을 가리켜 이곳으로 오게 하고
곡선으로는 곳곳의 장애물들을 돌아갈 수 있게 하고
원은 그저 가장 완전한 원으로 남을 수 있게

 

하나 이상의 다른 것을 가리킬 수 없도록

몸을 그리기에 백사장은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세계가 바로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도록 한다
비로소 이어지는 토르소에 숨이 깃드는 무렵

 

한 사람은 자신이 그가 속한 세계의 점들을 닮아간다
선이 되려는 수없이 많은 점들 속에서
선의 형태를 결정하는 순간의 움직임들을 통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원하는 곳으로 걸어간다

 

끝이 없을 것만 같은 모래들이 펼쳐져 있는 곳
지지 않을 것처럼 햇빛이 내리쬐는 장소
어느새 젖은 모래들 젖게 하는 물결을 따라가며
다가오는 물결들을 파도라고 이름 붙이며

 

자신에게 나타나는 선의 형태에 대해 생각한다
점과 선이 모여 만드는 경계를 해변이라 부르기로 한다
연한 안개 오후의 햇살 속에서 먼 곳을 가리키고
망가진 성과 발자국들 어디에서나 부드럽게 밟히는

 

멀고도 가깝게 펼쳐진 물결의 곡선을 따라 걸어간다
등 뒤로 새겨지는 모든 이름과 단어를 씻겨 내리며
자신에게 차오르는 빛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선이 되어 다가오는 점들을 눈부심 속에서 오래 바라본다

 

 

 

 

 

신두호 | 2013년 『문예중앙』 등단. 시집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