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당/2021년 여름호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김백겸-개양귀비는 여름의 숲길에 피어있다

알 수 없는 사용자 2021. 9. 1. 16:19

개양귀비는 여름의 숲길에 피어있다

 

 

개양귀비는 세월의 퀼트quilt에 수놓은 부귀공명이 십장생 자수처럼 영원하길 바란 늙은 학인의 꿈처럼 피어있다
개양귀비 저편에 있는 지옥의 힘이 판도라 상자처럼 열리면서 옥타브가 다른 세상의 풍악이 바람결에 들려온다
개양귀비가 공空으로 기초화장을 하고 색色으로 색채화장을 하니 마야maya 홍루紅樓가 만리장성
산책가가 오솔길의 푸른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니 사방에 요염한 꽃향기
개양귀비는 존재의 필사적인 유혹으로 탄생과 죽음을 위한 노래를 바람의 수금竪琴 반주와 함께 부른다

 

태양과의 섹스와 오르가즘에 취해 있는 붉은 꽃잎의 개양귀비는 노래한다
흰 머리가 억새풀처럼 무성하고 두 눈은 마른명태처럼 말라 병자의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몽상 학인이여
당신이 공부한 진리는 북극성의 별과 만년 빙하처럼 먼 이상과 차가운 관념입니다
대지의 기표signifie - 하늘의 아름다움인 내 모습을 쳐다보시지요
내 화밀花蜜은 숲의 계곡을 흔들고 내 자태는 세상의 모든 근심을 잊게합니다
4계의 현악사중주가 지하수로 흐르는 숲의 정원에서 나는 마라mara대왕의 딸 - 보리수 나무아래에 있는 싯타르타를 유혹한 음악과 춤이랍니다


마라대왕은 삶과 죽음의 미로 왕궁을 건축하고 긴 세월의 꿈을 즐겼으나 숙명의 때가 이른 어느 날 예언의 환상을 보았다지
왕관이 떨어지고 분수가 마르고 악기 줄이 끊어지고 칼과 창들이 녹스는 환상을 죽음의 꿈 한가운데서 대왕은 명상을 하는 싯다르타에게 악귀와 야차의 군대를 보내 불화살을 퍼부었으나 싯다르타는 침묵의 힘으로 화살을 지는 꽃잎으로 떨어뜨렸다는 열반경 기록
마라의 딸들이 ‘환상’과 ‘음악’의 육체로 싯다르타를 유혹했으나 싯다르타는 무욕으로 탐욕과 무명無明의 공격을 이겨냈다는 열반경 기록


싯다르타는 보리수나무아래서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우주의 정체가 12연기로 이루어진 극공極空임을 깨달아 정각正覺에 이르렀다지
싯다르타는 자신의 모든 과거세의 전생과 미래세의 후생이 한 시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동시적 사건임을 깨달아 인도신화의 마야maya - 시간의 환영과 주술로부터 벗어났다지
철학가와 시인은 불행하구나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는 불행처럼 자신과 우주가 서로 낯선 얼굴로 마주보는 순간을 견뎌야 하니
개양귀비 꽃잎이 시간이 가열한 용광로의 붉은 쇳물처럼 대지에 내려앉는 순간을 견뎌야 하니


산책가는 공원 소롯길의 벤치에 앉아 좌망坐忘에 든 선사처럼 마음의 고요함으로 개양개비를 본다
인생의 마경魔境인 제국의 황금 궁전과 부귀영화와 미인의 환상들이 선물의 비닐 포장지처럼 구겨지는 소리가 들린다

산책가는 소나기가 지나간 하늘의 구름 속에서 무지개 베일을 두르고 노을 립스틱을 바른 마라mara 공주들의 춤을 보고 있다
산책가는 지상의 개양귀비들이 생명의 모든 에너지를 모아 흔들리는 순간을 보고 있다


몽상 학인이 범선의 돛대에 몸을 묶어 사이렌siren의 휴혹을 이겨낸 오디세우스처럼 강제로 지상의 아름다움과 탐욕과 무명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는 몽상
몽상 학인이 미로의 출구를 찾는 발길을 멈추지 않고 숲의 어둠 속에서 햇빛이 비치는 큰 길로 걸어 나가는 몽상
몽상 학인이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 오온五蘊이 공空함을 보아 일체 고액苦厄에서 벗어난 것처럼 길 없는 길로 걸어 나가는 몽상


하지만 산책을 하는 몽상 학인은 탄식한다
지상의 아름다운 배우들이 모두 가면을 벗고 무대에서 퇴장한 이상한 스토리 속에서 어찌 살아야하나
지상의 악기가 부서지고 노래가 끊어진 적멸 속에서 어찌 살아야하나
몽상 학인이 진흙 연못에 사는 오리들의 부리에 고기가 물리지 않고 홍련은 붉은 꽃을 피우지 않는 대지의 열반涅槃속에서 무슨 기쁨으로 살아야 하나

 

 

 

 

 

김백겸 |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지질 시간』외 7권. 시론집 『시적 환상과 표현의 불꽃에 갇힌 시와 시인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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