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당/2021년 여름호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이경림-여기

알 수 없는 사용자 2021. 9. 1. 16:31

여기

 

 

거기 꽃삽 없어요? 그가 소리쳤다
꽃은 있는데 삽은 없고 .
내가 빈정거렸다


여기, 여기요
그가 다시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야?
내가 물었다


여기… 여기이…


소리가 길게 휘어지다가 사라졌다
아무리 둘러봐도 없는 여기가
사방에 숨어 있었다

 

박하분 같은 햇빛 속에
죽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여기 보이지 않나요?
여기가 또 불렀다


여기는 얼굴이 없었다
여기는 팔다리도 없고 여기는 모가지도 없고
머리칼도 없고 젖통도 없는데

 

여기가 사방에서 불렀다 그러나

 

여기의 눈빛 잠깐 스친 것 같고
벙어리 휘파람새 같은 그것 몰래 지나간 것 같고

 

 

 

 

이경림 | 1989년 『문학과 비평』 등단. 시집 『급! 고독』 외 6권. 시론집 『사유의 깊이 관찰의 깊이』. 산문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언제부턴가 우는 것을 잊어버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