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거기 꽃삽 없어요? 그가 소리쳤다
꽃은 있는데 삽은 없고 .
내가 빈정거렸다
여기, 여기요
그가 다시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야?
내가 물었다
여기… 여기이…
소리가 길게 휘어지다가 사라졌다
아무리 둘러봐도 없는 여기가
사방에 숨어 있었다
박하분 같은 햇빛 속에
죽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여기 보이지 않나요?
여기가 또 불렀다
여기는 얼굴이 없었다
여기는 팔다리도 없고 여기는 모가지도 없고
머리칼도 없고 젖통도 없는데
여기가 사방에서 불렀다 그러나
여기의 눈빛 잠깐 스친 것 같고
벙어리 휘파람새 같은 그것 몰래 지나간 것 같고
이경림 | 1989년 『문학과 비평』 등단. 시집 『급! 고독』 외 6권. 시론집 『사유의 깊이 관찰의 깊이』. 산문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언제부턴가 우는 것을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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