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별채 같은 고독
- 자동기술법으로
당신은 지나가는 사람. 무지몽매한 몸으로 떠도는 우리, 우리는 아무 일도 없는 하루를 산다. 오후에 한가롭게 중국차를 마시고 책을 읽을 때, 당신은 다육 식물을 키우는 일에 열심이다. 우리가 서로를 잘 알려면 몇 억 겁의 세월도 모자란다.
천 개의 폐를 가진 밤, 바람이 스칠 때 별은 기침을 한다. 오늘 밤하늘에는 별의 기침 소리로 가득 찼구나! 건강은 인류의 과거다. 방광이 깨끗하다는 건 지독히 외로운 일이다. 외로움은 당신에게만 일어난 존재 사건이다. 외로움이 늘 슬픔을 부양하는 건 아니다. 나는 가끔 담낭에서 시를 끄집어낸다. 고양이는 노조를 결성하지 않는 유일한 야간 노동자다. 김밥 한 줄을 먹고 외투를 걸친 채 산책에 나선다. 눈사람이 서 있는 거리에서 참다운 고독은 돌연한 존재의 정전(停電)이다.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뒹구는 검은 비닐봉지 속의 주검. 고양이의 수염과 사지는 이미 뻣뻣하다. 당신은 항상 늦게 도착한다. 모든 것을 그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리기엔 늦었다. 당신은 쓸개즙 같은 검은 고독 속에서 표류한다. 고독은 3억 8천 6백만 년 전의 숲에서 살아온다.
밤의 밑바닥에 당신의 이름을 썼다가 지운다. 이름은 세계와 나 사이의 중재자다. 눈 속으로, 하얀 눈 속으로 빠지는 당신의 발. 눈사람은 자꾸 어디로 사라진다. 당신은 말하고 입을 가리고 겨울의 시든 풀밭처럼 조용히 웃는다. 봄이 오면 기분이 좋아지겠지. 우리는 기린을 보러 동물원에 간 적이 없다. 봄이 오면 당신은 초록 화관(花冠)을 쓰고 거리를 걷겠지. 잘 웃는 당신, 겸손한 당신은 시금치를 좋아한다. 당신이 시금치를 먹을 때 소량의 철분이 당신의 핏속으로 녹아든다. 당신 속으로 하루치의 고독이 녹아서 스며든다. 당신은 밤의 별채 같은 고독을 끌어안으며 웃는다.
장석주 |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몽해항로』 『오랫동안』 『일요일과 나쁜 날씨』등. 질마재문학상, 영랑시문학상, 편운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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