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시백
수시로 나를 들락거리는
그와 그녀들
그때마다 내 몸에 쌓이는 피 묻은 돌멩이들
그 누구도 의식하지 못한 채
견고한 벽이 되고
나는 오늘도 그 벽에 기대
미처 몰랐던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또 다른 그와 그녀들을 발견한다
그러나 모두가 무한하고 모두가 유한하여
열 배, 백 배, 천 배로 증식해 나가다가도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구름처럼 흩어진다
날이 갈수록 그런 족쇄, 그런 흔적들은
위협적인 사냥개의 특성을 잃고 빛깔을 잃고
각각의 이미지로 각각의 이름으로 되돌아간다
나는 나
그와 그녀들은 그와 그녀들로
원래 그런 관계란 제 자신에게로 쏠린 전망 외엔
언젠가는 모두 바스러질 돌멩이들
나는 상심한 그 돌멩이들을 들어
이미 고된 연마가 끝난 그 관계의 수를 줄이고
그 관계의 온도를 식힌다
현명한, 그러나 부질없는 굴욕의 정수는
나 혼자만으로도 충분한 치욕,
충분한 노동
그 누구도 제 스스로 싹이 되어 자라는 걸
더 오래 참고, 기다려주지 않는다
김상미 | 1990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잡히지 않는 나비』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등. 박인환문학상, 지리산문학상, 전봉건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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