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당/2020년 가을호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이선영 - 럭셔리 가족 5

알 수 없는 사용자 2020. 12. 24. 15:25

럭셔리 가족 5

 

 

우리집에는 비관주의자 둘이 삽니다

입이 짧아서 밥도 많이 안 먹고 허튼소리도 잘 안 하는

뾰족하고 날카롭고 걸핏하면 찌르길 잘하는 둘이 삽니다

그 가시와 송곳으로 세상 여기저기 푹푹 쑤시고 다녀서 그런지 자칭 잘나가는 둘이 삽니다

가늘어야 대세라는 비주얼 시대에 미처 살 붙을 새가 없어 볼 만한 대세로 삽니다

 

우리집에는 낙관주의자 둘이 삽니다

뚫린 게 입이라 먹어본 것도 많고 입이 심심한 걸 잘 못 참는

입안에 머금은 꽈리향미들을 터뜨리는 일밖에 만사 귀찮아서 무지무지 게으른 둘이 삽니다

오늘밤에 바깥세상이 망한다고 해도 집안에서 뒹굴 수만 있으면 알 바 아니라며

비주얼 세상을 보이콧하는 집순이 집돌이 둘이 삽니다

 

낙관주의자 둘은 음양오행 가운데 화(火)가 딱 하나라서 매사 타오르다 그치고

비관주의자 둘은 음양오행 가운데 화(火)가 둘이라서 매사 애가 탑니다

 

비관주의자 둘이 낙관주의자 둘을 먹여 살립니다

낙관주의자는 앞으로 구르든 뒤로 구르든 둥글게둥글게, 구르기만 하면 되니까요

누울 자리만 있으면 세상은 늘 평화롭고 평평하며, 세상이 망하는 그날에도

낙관주의자 둘이 할 일은 어차피 없을 테니까요

 

비관주의자 둘에게만 세상은 싸워야 하고 맞서야 하는 전장이 됩니다

비관주의자 둘이 낑낑거리며 낙관주의자 둘을 끌고 갑니다

낙관주의자 둘이 낄낄거리며 비관주의자 둘을 놀려 댑니다

그런데 또 가만히 들여다보면 낙관주의자 둘이 나머지 둘을 자꾸 비관주의자로 만듭니다

그렇게 네 개의 화차는 끼리끼리 돌아갑니다

 

 

 

 

 

이선영 | 1990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오, 가엾은 비눗갑들』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 『60조각의 비가』 등. 김종철문학상 수상.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