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당/2020년 겨울호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최형심 - 만약

알 수 없는 사용자 2020. 12. 28. 18:11

만약

 

 

양철로 된 바람이 있다면

그 바람 위에 막 발자국을 찍은 구름이 있다면

번호판 대신 당신의 이름표를 달고 달리는 차가 있다면

 

그리하여

낚싯대를 드리우고 떠돌이 꼬마별들을 낚을 수 있다면

 

찔레꽃에 물린 뱀의 투병기를 읽다가

어느 유월에 떠난 사람과 깍지를 끼며 안녕, 인사할 수 있다면

 

그를 보낸 밤을 빨랫줄에 걸어 보송보송 말리고

깡통 가득 찬 별들을 툭툭 따며 한밤을 보낼 수 있다면

 

무릎 위에 쏟아진 별들 위로

아주 오래전에 삼킨 들숨을 후후 뱉어낼 수 있다면

 

첫 번째 봄과 마지막 봄을 맞바꿔주는 고물상이 있어

한 사람을 잃고 열차가 떠난 뒤에도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사랑의 뫼비우스의 띠가 있다면

 

달그림자에 베인 고양이 귀에 바람을 감아주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유리창에 내린 별과자를 아그작 씹을 수 있다면

 

그리하여 내가 당신을 잊었다 말할 수 있다면,

 

 

 

 

 

최형심 |2008년 『현대시』 등단. 시집 『나비는, 날개로 잠을 잤다』. 2019년 심훈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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