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양철로 된 바람이 있다면
그 바람 위에 막 발자국을 찍은 구름이 있다면
번호판 대신 당신의 이름표를 달고 달리는 차가 있다면
그리하여
낚싯대를 드리우고 떠돌이 꼬마별들을 낚을 수 있다면
찔레꽃에 물린 뱀의 투병기를 읽다가
어느 유월에 떠난 사람과 깍지를 끼며 안녕, 인사할 수 있다면
그를 보낸 밤을 빨랫줄에 걸어 보송보송 말리고
깡통 가득 찬 별들을 툭툭 따며 한밤을 보낼 수 있다면
무릎 위에 쏟아진 별들 위로
아주 오래전에 삼킨 들숨을 후후 뱉어낼 수 있다면
첫 번째 봄과 마지막 봄을 맞바꿔주는 고물상이 있어
한 사람을 잃고 열차가 떠난 뒤에도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사랑의 뫼비우스의 띠가 있다면
달그림자에 베인 고양이 귀에 바람을 감아주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유리창에 내린 별과자를 아그작 씹을 수 있다면
그리하여 내가 당신을 잊었다 말할 수 있다면,
최형심 |2008년 『현대시』 등단. 시집 『나비는, 날개로 잠을 잤다』. 2019년 심훈문학상 수상.
반응형
'시마당 > 2020년 겨울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이경철 - 성벽 산책 (0) | 2020.12.28 |
---|---|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김옥남 - 잊혀진다는 것 (0) | 2020.12.28 |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강정임 - 매화 茶 (0) | 2020.12.28 |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김성규 - 하루 전날 (0) | 2020.12.28 |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고영민 - 쇠 냄새 (0) | 2020.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