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당/2021년 봄호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김박은경 - 노엘

알 수 없는 사용자 2021. 3. 18. 17:13

 

노엘

 

 

 

 

  보라색 장화를 신은 그녀는 검은 패딩 점퍼에 황금빛 브로치를 단 그녀는 농게처럼 부푼 엄지손가락에 밴드를 감은 그녀는 억지로 접힌 베개처럼 앉은 그녀는 이마에 뺨에 손등에 검은 꽃이 무성한 그녀는 끓는 기름 속을 어지러운 개수대 물통 속을 산해진미의 찌꺼기 속을 헤매느라 슬플 일도 울 일도 없이 밭은 숨을 이고 지고 가자, 그래 가느라 길고 긴 하루씩 질기게 버텼을 텐데 4분의 4박자로 연신 울리는 전화도 받지 않고 코도 골지 않고 잠꼬대도 하지 않고 입은 약간 벌어져있는데 성탄이라 신의 아이를 낳는 꿈이라도 꾸는 걸까 탯줄을 목에 걸고 지쳐버린 만신창이를 기어코 밀어내려는 걸까 내일의 최악이 오늘의 최선이라면 그게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면 어이없는 우연에라도 기댄다는 걸까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다고 다행이라고 감사라도 해야 할까, 틈마다 벌어진 듯 서늘해지는 버스는 서천꽃집을 지나는데 만화방창 검은 땅에 맑은 물을 주려고 저 장화를 신고 나왔을까 붉은 의자는 이미 축축해지고 신호등은 동방의 별처럼 환한데 흰 눈 대신 북풍이 부는지 사람인지 귀신인지 그저 한 그루 텅 빈 나무인지 가능한 손마다 미친 듯이 흔드는 밤의 지붕 위에서 누군가 그녀의 점퍼를 들고 복(復) 복(復) 복(復) 소리치는 것도 같은데

 

 

 

 

 

김박은경 | 2002년 『시와 반시』 등단. 시집 『온통 빨강이라니』 『중독』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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