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은행
길 건너편 상가 지하 2층에 은행이 있다. 낡은 문을 밀며 들어서면 지하 특유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꾸깃한 지폐 냄새가 섞여, 무덤 같은 어둠과, 그 속에 붉게 빛나는 눈들이 있다. 매일 청소를 하지만 거미줄에는 노란, 줄무늬가 무서운 거미들과 천장의 석류램프에는 이따금씩 나방들이 뛰어들어 터지는 비명이, 들리고 매일 청소를 하지만 바닥은 끈적거리는, 늪의 습기와 썩어들어가는 나뭇가지들과 무언가가 가라앉고 있다. 상가 계단은 아래로, 지하로, 어둠 속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한참을 내려, 가다, 보면 은행 문이 보인다. 낡은 문을 밀고 들어서면 급여이체를 위한 추가상품과 지로 공과금과 주택청약종합저축 안내문이 덜덜, 떨고 바람은 왜 그리 세게 부는지, 서늘한 감촉의 카드와 무인지급기와 도장과 보안카드와 지급명세서와 뻔한 금융정보가 이체되고 있다. 낡은 문을 밀고 나오다, 보면 발끝에 아까 썼던 종이 뭉치들이 채인다. 툭툭, 채인다. 대기순번표가 미세먼지 없는 깨끗한 하늘을 만드는 금융정보 톡!에 걸려있고 상가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오지만 미세먼지 없는 깨끗한 하늘이 바로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옛날 좋았던 시절을 기억하라며 손에 금화 한 닢을 쥐여준다. 진짜 금화가 맞는지 이로 깨물어 보고 싶지만, 동전은, 너무 더러워, 그냥 주머니에 넣는다. 그냥 진짜라고 믿도록 하자
서정학 | 1995년 『문학과 사회』 등단. 시집 『모험의 왕과 코코넛의 귀족들』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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