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소리, 바람소리
― 소쇄원(瀟灑園)에서
서로 폐 끼치며 사는 거다, 이 화상아
자미탄이
백일홍의 그림자로
여인의 붉은 치마처럼 너울거릴 때
어느 저녁은 올 것이다
그 저녁이 오면
모두의 선의를 뿌리치고 간 너도
어느 강변쯤에는 가 있겠지
나는 제월당에 누워 쥘부채를 멈추고
왼쪽 귀에는 계곡의 물소리를 담고
오른쪽 귀로 대숲의 바람소리를 흘린다
이 원림은 은근히 관능적이다
오곡문 담장 위를 타고 오르는 해찰 맞은 바람처럼
생은 통째로 개 혓바닥 같이 숨찬 것이었느냐?
나는 모르겠다
소쇄/소쇄/소쇄/소쇄/소쇄
춘삼월의 바람이 대숲을 쳐
靑竹春光에 날리는 저 대이파리들의
장하게 잎 부비는 소리를 듣는다
아아 너는 어느 개여울에 앉아 울고 있는 것은 아니냐,
우리가 지나온 그 좋았던 날들이
먼 수평면상의 궤적으로
아찔한 부표처럼 떠오를 때
게으른 수로를 따라
너에게 닿을
물소리 바람소리
소쇄/소쇄/소쇄/소쇄/소쇄
―차가와요, 차가와요
달빛은 광풍각의 지붕에서 머물고
물빛은 오동나무 그늘에서 반짝이네
계곡을 타고 오르는 물소리 바람소리
응? 애양단에는 왠 사슴이,
그리움처럼 나타났다 사라진다
함성호 | 1990년 『문학과 사회』 등단. 시집 『56억 7천 만 년의 고독』 『성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등. 현대시 작품상, 공간건축평론 신인상 수상.
반응형
'시마당 > 2020년 여름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신현락 - 부름 (0) | 2020.12.24 |
---|---|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김규은 - 백차를 기뻐한다 (0) | 2020.12.24 |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성윤석 - 삼월의 눈 (0) | 2020.12.23 |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박라연 - 어느 저녁에 (0) | 2020.12.23 |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김선진 - 아직도 내가 못가는 까닭 (0) | 2020.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