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당/2020년 겨울호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김왕노 - 불의 낫

알 수 없는 사용자 2020. 12. 28. 17:41

불의 낫

 

 

아버지께서

새벽 모서리에 자리 잡고서

녹슬고 무디어진 낫을 가신다.

잠깐 비워두면 잡풀이 돋아나는

할아버지 산소를 벌초하러

그간 뒤란에 팽개쳐둔 낫을 찾아

젊었을 때 논두렁 밭두렁

풀을 깎고 소꼴을 하러 낫을 갈듯

죽은 날을 새파랗게 살리신다.

휘두르면 어둠이 절단 날 낫

불의 낫 한 자루를 준비하신다.

잠깐만 팽개쳐두면 녹이 슬고

무디어진 아버지의 일상도

눈치코치도 없고 감각이 없는

내 촉의 각도 새파랗게 세워주며

아버지 팽개쳐둔 낫을 가신다.

언젠가 낫을 갈며 이 낫으로

동학처럼 미친놈에게 확 들이대는

날이 와야 이 땅의 사람과 내가

잘 사는 날이 올 거라 하셨던

아버지가 다시 낫을 가신다.

무디어진 세월에 새파란 날을

아버지가 새벽부터 세우신다.

 

 

 

 

 

김왕노| 192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등. 한국해양문학대상, 박인환 문학상, 지리산 문학상, 디카시 작품상, 한성기 문학상, 풀꽃 문학상, 2018년 제 11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시상, 시작문학상 등 수상. 축구단 글발 단장, 한국 디카시 상임이사,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현재 문학잡지 『시와 경계』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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