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낫
아버지께서
새벽 모서리에 자리 잡고서
녹슬고 무디어진 낫을 가신다.
잠깐 비워두면 잡풀이 돋아나는
할아버지 산소를 벌초하러
그간 뒤란에 팽개쳐둔 낫을 찾아
젊었을 때 논두렁 밭두렁
풀을 깎고 소꼴을 하러 낫을 갈듯
죽은 날을 새파랗게 살리신다.
휘두르면 어둠이 절단 날 낫
불의 낫 한 자루를 준비하신다.
잠깐만 팽개쳐두면 녹이 슬고
무디어진 아버지의 일상도
눈치코치도 없고 감각이 없는
내 촉의 각도 새파랗게 세워주며
아버지 팽개쳐둔 낫을 가신다.
언젠가 낫을 갈며 이 낫으로
동학처럼 미친놈에게 확 들이대는
날이 와야 이 땅의 사람과 내가
잘 사는 날이 올 거라 하셨던
아버지가 다시 낫을 가신다.
무디어진 세월에 새파란 날을
아버지가 새벽부터 세우신다.
김왕노| 192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등. 한국해양문학대상, 박인환 문학상, 지리산 문학상, 디카시 작품상, 한성기 문학상, 풀꽃 문학상, 2018년 제 11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시상, 시작문학상 등 수상. 축구단 글발 단장, 한국 디카시 상임이사,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현재 문학잡지 『시와 경계』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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