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카를 마실 시간
달리는 영혼이었나
중앙아시아의 창밖
흔들리며 다가오는 황무지는
추 추¹ ~ 말 잔등을 채찍하는 유목의 길이다
해질녘 소꼴을 먹이는 아이와
흙먼지 날리는 길가에서
환한 손 흔들어주는 순한 얼굴들
오래지 않은 어제가
돌아가야 할 내일이 아니냐고 묻는다
기억들은 미루나무가 많은 옛 마을을 더듬는다
저 나무들 사이 흙먼지 자욱한
낡은 버스가 달리기도 했지
그 버스 꽁무니가 흘리는 낯선 냄새를 좇아
코를 벌름거리기도 했는데
코딱지만 한 가게를 할까
작은 그리하여 정겨운
발걸음이 걸어 나올 것 같은 점방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만두를 빚던 손을 옷자락에 훔치며
옛날처럼 일어나실까
추억과 시간과 나는
붕붕 봉고차를 몰고
하늘이 맞닿는 산골을 돌며 꿀벌을 칠 것이다
벌들이 돌아오는 저녁을 기다리는 동안
낮잠을 자다가
그림자를 늘이다가
시집을 끄적거릴 수 있을까
너무 많이 흘러와버린 것은 아닌가
전차 같은 바퀴를 달고
세상의 험한 길을 어디까지 갈수 있나
자꾸 쥐가 나오는 낡은 다리에 힘을 줘볼까
너도 그렇게 늙어왔구나
한 여름에도 산 너머 산에는
흰 모자를 쓰고 있네
아무도 굽어보지 않는
슬픔을 돌아서서 감다가
얼킨 실타래처럼 풀어보다가
늙어가도 좋아
양고기가 익을 때까지
보드카를 마시다가
쓰러질 수 있을 거야
술이 취해 춤을 추다가
몸이 파랗게 녹아내려버려서
물을 떠나지 못하는 물이며
물새면 구름이면
한잎 풀이면 어떠리
한여름의 겨울이면 어떠리
그 겨울의 여름이면 어떠리
양고기가 익었다
보드카를 마실 시간이다
1) 중앙아시아 키르기즈스탄 등에서 말을 빨리 달리게 할 때 말을 차거나 채찍을 휘두르며 내지르는 소리.
박남준|1984년 『시인』 등단. 시집 『중독자』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적막』 등. 천상병시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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