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당/2020년 겨울호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박남준 - 보드카를 마실 시간

알 수 없는 사용자 2020. 12. 28. 17:32

보드카를 마실 시간

 

 

달리는 영혼이었나

중앙아시아의 창밖

흔들리며 다가오는 황무지는

추 추¹ ~ 말 잔등을 채찍하는 유목의 길이다

해질녘 소꼴을 먹이는 아이와

흙먼지 날리는 길가에서

환한 손 흔들어주는 순한 얼굴들

오래지 않은 어제가

돌아가야 할 내일이 아니냐고 묻는다

 

기억들은 미루나무가 많은 옛 마을을 더듬는다

저 나무들 사이 흙먼지 자욱한

낡은 버스가 달리기도 했지

그 버스 꽁무니가 흘리는 낯선 냄새를 좇아

코를 벌름거리기도 했는데

 

코딱지만 한 가게를 할까

작은 그리하여 정겨운

발걸음이 걸어 나올 것 같은 점방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만두를 빚던 손을 옷자락에 훔치며

옛날처럼 일어나실까

 

추억과 시간과 나는

붕붕 봉고차를 몰고

하늘이 맞닿는 산골을 돌며 꿀벌을 칠 것이다

벌들이 돌아오는 저녁을 기다리는 동안

낮잠을 자다가

그림자를 늘이다가

시집을 끄적거릴 수 있을까

너무 많이 흘러와버린 것은 아닌가

 

전차 같은 바퀴를 달고

세상의 험한 길을 어디까지 갈수 있나

자꾸 쥐가 나오는 낡은 다리에 힘을 줘볼까

너도 그렇게 늙어왔구나

한 여름에도 산 너머 산에는

흰 모자를 쓰고 있네

 

아무도 굽어보지 않는

슬픔을 돌아서서 감다가

얼킨 실타래처럼 풀어보다가

늙어가도 좋아

 

양고기가 익을 때까지

보드카를 마시다가

쓰러질 수 있을 거야

술이 취해 춤을 추다가

몸이 파랗게 녹아내려버려서

물을 떠나지 못하는 물이며

물새면 구름이면

한잎 풀이면 어떠리

한여름의 겨울이면 어떠리

그 겨울의 여름이면 어떠리

 

양고기가 익었다

보드카를 마실 시간이다

 

 

1) 중앙아시아 키르기즈스탄 등에서 말을 빨리 달리게 할 때 말을 차거나 채찍을 휘두르며 내지르는 소리.

 

 

 

박남준1984시인등단. 시집 중독자』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적막. 천상병시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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