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당/2021년 가을호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천수호-빈방

Ofil 2021. 12. 9. 15:20

빈방

 

 

사진이 걸린 방
눈동자에 빛이
새날 아침처럼 그득 담긴
그가 입은 정장은 상복에 가깝고
하려는 말이 전혀 없어 보이는 입술
그것이 사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쉽지도 않고
그가 방을 둘러볼 때마다 빈 곳은 사라진다


저 왔어요,
내 말이 너무 커서 빈 곳이 생기기 시작한 방
사라진 이불 밑에서 들리는 고른 숨소리
작은 쌀 봉지 옆에 두어 개 남은 팩 두유와 느슨해 보이는 휴
지 꾸러미
비누 몇 장과 치약 두어 통
산 자의 것이 널브러진 이 방


그를 한 번씩 흔들어 깨우던 울음소리도 집을 비워서
썩지 않는 것만 남아서 산 자를 증명하는 방


바닥은 차고 매끄럽고
생시라 부르기 어려운 것들을 불러내기 좋은 곳
떠난다는 말이 이렇게 꽉 찬 구멍들이라는 걸
한 장의 사진이 대신 말하고 있는
아직 문을 열지 못하는 방


저 왔어요,

목소리만 문을 치고 돌아 나오는
아주 오래전엔 초인의 종소리가 들리지 않던
그 방

 

 

 

 

 

천수호 |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 『우울은 허밍』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매계문학상 수상.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