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를 읽다
가랑비 하루 종일 작은 초록 위로 흘러들고 발등을 적시는 저녁의 흙냄새가 소쿠리에 담기는 텃밭 가는 길은 파랗고요 개구리밥 논물에 그렁거려요 질척한 밭둑으로 비닐우산 속 하늘은 맨발로 첨벙이고 청개구리 한 마리 폴딱 아욱밭으로 뛰어 들어요 거기, 잎사귀 뒤에 숨어 있던 달팽이 놀란 가슴 천천히 더듬이로 어루만져요 가만가만, 저 천천히는 무얼까요 청개구리처럼 뛸 수도 없고 밤마다 찾아오는 그리움의 무게를 목청껏 뿜어낼 수 없는 슬픔의 기호일까요 빠르고 단단하고 높은 것들이 행과 행을 이루는 편견의 문장엔 쉼표도 없고 느낌표도 안보여요 얼마나 안간힘을 썼으면 연을 바꾸는 행간이 침묵으로 사뭇 축축할까요 행여 눈물도 상처도 더듬이로 달래는 저 둥근 고요가 몸이 몸을 껴안고 생을 끌고 가는 거라면 하늘이 온통 자기 것이라는 여유일까요 온몸 구석구석 울음의 단락까지도 밀고 가는 한 걸음을 말랑말랑한 자신감으로 읽으니 보일 듯 말 듯 저 적막의 속도가 눈부시네요 아욱밭 푸른 잎사귀 가슴을 뚫고 까마득한 새벽을 향해 생의 깊이를 가만가만 건너가는 달팽이의 저녁 길이 논물 위에 뜬 개구리밥보다 더 파랗게 빛나요 세상이라는 문장이 오늘보다 더 환해지네요
박경옥 | 2008년 계간 『문파』 등단. 수필집 『발자국마다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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