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당 227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서정학-지하은행

지하은행 길 건너편 상가 지하 2층에 은행이 있다. 낡은 문을 밀며 들어서면 지하 특유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꾸깃한 지폐 냄새가 섞여, 무덤 같은 어둠과, 그 속에 붉게 빛나는 눈들이 있다. 매일 청소를 하지만 거미줄에는 노란, 줄무늬가 무서운 거미들과 천장의 석류램프에는 이따금씩 나방들이 뛰어들어 터지는 비명이, 들리고 매일 청소를 하지만 바닥은 끈적거리는, 늪의 습기와 썩어들어가는 나뭇가지들과 무언가가 가라앉고 있다. 상가 계단은 아래로, 지하로, 어둠 속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한참을 내려, 가다, 보면 은행 문이 보인다. 낡은 문을 밀고 들어서면 급여이체를 위한 추가상품과 지로 공과금과 주택청약종합저축 안내문이 덜덜, 떨고 바람은 왜 그리 세게 부는지, 서늘한 감촉의 카드와 무인지급기와 도장과 보..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윤제림-지구인

지구인 …한때 같은 별에 살았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는 지금 어깨동무를 하고 바싹 붙어 앉아 있다, 처음 본 사이에! 다 어디로들 갔을까, 두 사람은 여기 있는데 윤제림 | 1987년 『문예중앙』 등단. 시집 『삼천리호자전거』 『황천반점』 『편지에는 그냥 잘 지낸다고 쓴다』 등. 시선집 『강가에서』. 동시집 『거북이는 오늘도 지각이다』. 동국문학상, 지훈문학상, 영랑시문학상 등 수상. 서울예술대학교 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 역임. 현재 경희대학교 국문과 교수.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박주택-다시 두 사람

다시 두 사람 -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꽃 피는 밤 남산 가까이 구름이 쉬어 가고 타워는 빛난다 핏기없는 여자 막바지에 다다라 잠수교를 걷는다 손이 닿기를 기다리는 알은 해쓱하다 귀신이 차기 시작하는 저녁 남자는 깨진 달 아래를 걷는다 깨진 달 별을 낳을 수 없는 밤 여자는 이태원 쪽으로 남자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목이 굳은 길을 걷는다 꽃 지는 밤 남자는 걷는다 별을 낳는 밤을 여자는 걷는다 손이 닿는 알 곁을 여자는 이사 간 집으로 들어가고 남자는 이사 온 집으로 들어간다 여자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남자는 죽는 게 죽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남자는 빌려준 존재처럼 개를 기르고 여자는 빌려온 존재처럼 고양이를 기른다 남자는 여자 속을 걸어 남자 속으로 여..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유자효-손자의 사유재산

손자의 사유재산 일곱 살배기 손자에게 사유재산이 생겼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준 세뱃돈이나 용돈을 상자에 담아 안방 벽장 안에 넣어두고 가끔 꺼내 본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봤더니 나중에 결혼하면 우리 집과 여자애 집 사이에 자기 집을 사기 위해서란다 용돈을 알뜰히 모으는 일곱 살배기 손자 오늘도 벽장을 열고 상자를 꺼내 제가 살 집값을 셈해보고 있다 유자효 | 1968년 신아일보(시), 불교신문(시조)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신라행』 시선집 『세한도』 시집해설서 『잠들지 못한 밤에 시를 읽었습니다』. 공초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신달자-어이! 달

어이! 달 어떻게 여길 알았니? 북촌에서 수서에서 함께 손잡고 걸었던 시절 지나고 소식 없이 여기 경기도 심곡동으로 숨었는데 어찌 알고 깊은 골 산그늘로 찾아오다니… 아무개 남자보다 네가 더 세심하구나 눈웃음 슬쩍 옆구리에 찔러 넣던 신사보다 네가 더 치밀하구나 늦은 밤 환한 얼굴로 이 인능산 발밑을 찾아오다니… 하긴 북촌골목길에서 우리 속을 털었지 누구에게도 닫았던 마음을 열었었지 내 등을 문지르며 달래던 벗이여 오늘은 잠시라도 하늘 터를 벗어나 내 식탁에서 아껴둔 와인 한 잔 나누게 가장 아끼던 안주를 아낌없이 내놓겠네 마음 꽃 한 다발로 빈 의자를 채워주길 바라네 어이! 달! 신달자 | 1972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봉헌문자』 『모순의 방』 『아버지의 빛』 등. 수필집 『그대에게 줄 말은 연..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한준석-데생

데생 동경하는 토르소 팔꿈치를 핥을 수 없는 혀를 달고서 물어뜯은 손톱을 가만히 바라봐 이번 생은 실패일까 너를 안고서 놓치는 상상을 해 잠깐 환해지는 안쪽 위험한 모습으로 자세가 무너져 그건 이미 내가 가진 소문이고 조용하게 엎질러져 있는 너를 보며 우리의 입안은 뾰족한 단위로 이루어진 걸까 비 내리는 오후처럼 금이 가는 바깥은 몸에 감싸기 쉽고 세수를 하는 아침은 화장실 불을 켜지 않는 일이 많아져 턱을 괴더니 부서지기 쉬운 무게 같아 현관문을 열어놓고 나가는 애인처럼 예감으로 가득 찬 두 다리를 팔로 끌어안으면 나는 나에게 자꾸만 해로워지고 있어 발가락만 조금 꼼지락거리면 아, 날아간다 나는 멈춰 서서 흘린 그림자가 있어 한준석 | 202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등단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남수우-오렌지 빛 터널

오렌지 빛 터널 내게도 허락된 창턱이 있었다 날마다 그것을 딛고 넘어오는 것은 빛 다음에 어둠 그리고 다시 빛 연기가 자욱한 날에도 둘 중 하나를 기다렸다 어둠 다음에 빛 시간이 흐를수록 커피 잔은 식어간다 커피를 다 식히면 시간도 멎을까요 빛이 넘어 간단다 저녁 아래 나는 잠들어 있었다 잠 아래 내가 촛불을 태운다 맞은편 창가에는 늙은 사람이 턱을 괴고 앉아 들릴 듯 말 듯 불 아래서 중얼거리고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창턱의 다알리아는 붉은 잎을 하나씩 떨어뜨렸다 시간이 속을 태우기도 하나요 빛이 넘어갈 뿐이란다 꽃잎이 검붉게 말라갈 무렵 나는 잠에서 깼다 흰 천장 아래로 고작 이십 분이 흘러 있었다 사람들은 친절했다 나는 딸기 두 송이를 훔쳐 달아났다 집 앞 문턱을 넘으면 으깨진 딸기즙이 두 손 가득 ..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조효복-떠도는 잠

떠도는 잠 젖은 아기들이 오네 물 위를 떠도는 가방들 아기들의 잠은 가벼워 수초들은 조금씩 몸을 키웠네 물고기처럼 자주 놀라 울음을 잊은 아기들 살이 무른 풀들도 숨죽여 가방을 끌어안았지 바람의 말에 순종하며 가만히 흔들렸지 잠이 닿은 그곳에선 언덕을 쌓고 해와 함께 달리겠지 툭툭 털어낸 햇빛이 발가락 사이에 고이겠지 네 함성이 무늬를 갖고 이야기가 생길 거야 밤이 오면 달빛에 몸을 말고 자장가를 나누겠지 먼동이 트고 기별은 없고 울음뿐인 몸들이 수로를 헤매네 빈 요람이 흔들리네 가방 속 아이들아 지문을 잃고 어둠을 삼키며 얼굴보다 큰 슬리퍼를 끄는 아이들아 세워도 세워도 미끄러지는 껍질을 깬 발룻*에서 검푸른 불꽃이 피네 엉긴 부리의 울음을 끌어안으면 노랑 승합차가 긴 조문을 떠나네 * 부화 직전의 오..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류휘석-지구 멸망 브이로그

지구 멸망 브이로그 늦잠 자고 일어났는데 아무래도 지구가 망한 것 같다 꿈이겠지 집도 무사하고 잘 때 켜둔 텔레비전에서 여전히 소리가 나고 있으니까 그러나 화면에는 놀랍도록 발전한 기술력으로 놀랍도록 쉽게 망해버린 지구가 송출되고 있었다 살아남은 인류는 집에 숨어 텔레비전을 틀어두고 기도했다 주인공이라면 어떻게든 구원해줄 거라고 믿었는데 잠깐 부엌에 간 사이 인류 마지막 주인공이 죽었다 나는 솜이 다 터져 나온 소파에 앉아 고추참치를 먹으며 주인공이 쓰러지는 장면을 보았다 잠시 송출이 멈췄다가 악당의 다음 행선지로 화면이 전환되었다 익숙한 주택가의 익숙한 건물을 지나 악당은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악당 앞에 섰다 화면에 내가 동의 없이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정말 주인공이 ..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노혜진-지금의 우정

지금의 우정 나는 이층에 산다. 밤에 잡곡빵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일층 입구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았다. 못 보던 얼굴이었다. 나의 창문 아래로 빵을 던진다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질 것이었다. 토스트기를 통과하지 않은 빵을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속도로 먹으며, 그를 지나치던 순간을 떠올렸다. 남자는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이 건물 앞에서라면 다들 서 있었지만 그는 계단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기다리는 것 같았다. 무리를 지어 다니거나 뭉쳐 있는 사람들의 거리에서 건물의 둘레를 자신만으로 채우고 있었다. 두 칸이 전부인 계단에 잠시 살고 있는 것일까.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자세와 달랐다. 오래도록 머무르려는 것 같았다. 다음 날에는 남자의 등을 보았다. 쭈그리고 앉아 부스럭거리고 있었는데, 커다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