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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수필마당] 손경호 - 진주반지

진주 반지 결혼 때 아내에게 준 선물은 수정(水晶) 반지였다. 얼마 안 되어 그 반지에서 알이 빠져나가 잃어버리고 낙담하고 있을 때, 나중에 진주 반지를 다시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진주가 보석 중에 여왕 대접을 받는 아주 귀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진주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미려한 외관이나 희귀성 때문일 것이다. 무기질 탄소의 다이아몬드도 귀하기는 하지만 유기화합물인 탄산칼슘의 진주와는 전혀 다르다. 산 사람이 살아 있는 원소의 보석을 만나는 궁합은 찰떡궁합일 거다. 궁합이 잘 맞는 부부여야 살아가면서 사랑의 깨가 쏟아진다고 한다. 모래밭의 조개 안에 모래알이 들어가면 조갯살이 이물질에 반응하며 자기 몸을 방어하려고 체액을 분비하여 에워싼다. 모래알을 바깥으로 내치지는 못하고 긴긴 세월 몸 안에 품은..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수필마당] 오정순 - 열정의 산물

열정의 산물 무엇이 길을 내는가. 무엇이 하는 일에 열매 맺게 하는가. 나는 왜 무엇에 마음이 꽂히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가. 빗소리 굵어서 밖을 내다 볼 수 없을 즈음이면 찻잔을 들고 앉아 직진하는 그 힘의 뿌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꿈속에 까지 쳐들어 와 나를 점령하던 것들은 결국 끝을 보고 나서야 물러선다. 6세 때 내가 살던 집은 공터에 덩그러니 한 채 있는 관사였다. 사람과 사귀어야 할 나이에 나는 곤충과 잡초들을 친구 삼아 성장하였다. 지금도 바랭이, 왕바랭이, 도꼬마리, 까마중, 왕비름 등의 풀이 내 눈 앞에서 살랑대며 말을 걸어온다. 아는 만큼 보이고 친숙한 만큼 다가가게 되는 만큼 나는 식물에 대한 애정이 그런 연유로 남달랐다. 초록이들이 내 시야에 있어야 ..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장현 -「index.」

「index.」 July 11, 2020 이제 조금 여유가 생겨 답을 합니다. 여러 번 얘기했지만, 두 가지 일을 하느라 장현이가 그 누구보다 힘든 학기를 보냈을 겁니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과제를 마무리해줘서 고마워요. 혹시라도 학우들에게 상대적 박탈감 등의 감정이 생길까 봐 소소한 과제들도 표나게 주문했던 걸 이해해주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제 검색하다 보니 가 발간되었던데 억수로 축하해요! 장현이 만날 날이 아직 먼 것 같은데 직접 받는 기쁨을 위해 참아보겠습니다.^^ 방학 동안 좋은 시간, 힘든 시간, 휴식의 시간을 두루 나누면서 더욱 큰 시인의 발판을 다지길 바랍니다. 이영숙 선생님의 메일 받았고 June 31, 2020 채미희 계속해서 MBTI검사를 권해 데이터 빅데이터 속에서 너 이러다가 이..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김동균 - 환송

환송 외판원이 노래를 튼다 노래엔 외판원이 등장한다 약국 왼쪽을 돌아 나온 외판원이 노래를 따라 찾아왔고 외판원들이 모여 있는 외딴곳에서 외판에 대해 은밀한 얘기를 나눈다 수요일에는 단상에 올라간 외판원이 외판에 실패하는 대표적인 사례를 설명한다 “제 경우에는 지하상가 입구에서……” 로 시작하는 이야기가 들린다 목요일의 외판원이 중요한 점을 선별해서 수첩은 까매진다 금요일에는 그리고 토요일에는 여행용 가방을 끌고 나가는 외판원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외판원끼리 마주쳐서 외판을 식별하기도 한다 “반갑습니다” 마치 처음 보는 물건인 것처럼 모든 쓰임에 관해서 빠짐없이 알려주겠다는 듯이 외판원은 친절하고 정중하게 고개 돌리는 법을 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의 목소리는 마지막으로 묻는 것처럼 들린다 물건..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최완순 - 봄

봄 죽어가는 것들의 소생력 치열하다 검은 얼굴 꽃비로 세수하고 가지마다 태아의 울음소리 맺히면 새 살 돋아난 생명들 들숨날숨 꽃이다 껍질 벗겨진 새뽀얀 아가의 얼굴 핏물 물고 상처 치유하는 저 환희 살갗 터지는 고통들의 잔치 숨소리 숨소리들 파랗다 웃음소리 웃음소리들 싱그럽다 생의 서막이 우렁차다 최완순 |2011년 계간 『문파』 수필, 2019년 시 등단. 시집 『네 눈 속에 나』. 수필집 『두릅 순 향기와 일곱 살 아이』 『꽃삽에 담긴 이야기』.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이리영 - 메리고라운드

메리고라운드 낡아 빠진 오버롤을 입은 아이야, 네 손에 들린 잘 익은 토마토와 딱딱한 바게트 한 쪽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이 사라지는 마법 하루 종일 밤 냉장고에 죽은 고기들이 오래 핏빛을 잃지 않는 이유를 물었지 투명한 물병에 개미들을 수북이 빠뜨리며 풀을 뜯어먹던 말들이 달아나는 곳으로 길어지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두려울 게 없다고 속삭이는 해바라기 밭으로 반짝이는 펜던트들은 훔쳐 더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아 천천히 고개를 젓고 모든 것이 젖어버리는 빗속으로 커다란 눈으로 펄럭이는 이파리 사이로 높고 높은 지붕 위로 큰 장화를 신고 개울을 건너는 아이야, 바람에 부풀어 오르는 주름치마를 따라 아주 멀리, 더 멀리 가면 태어난 것을 잊을 테니 이리영 | 2018년 『시인동네』 등단.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이중환 - 낙엽이불

낙엽이불 갈바람이 재촉하듯 후두둑 낙엽 진다 절정의 단풍 낙엽으로 대지를 덮는다 벌거숭이 나무 발목만 덮듯 우리도 낙엽이불로 발목만 덮자 삭풍에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지고 모진 칼바람 귀볼 때리는 겨울이 와도 벗은 나무가 추워하지 않는 것은 뜨겁게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겹겹의 사랑이 묻은 낙엽이불로 발목만 덮자 이중환 |2017년 계간 『문파』 등단. 시집 『기다리는』.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이춘 - 조그만 기억

조그만 기억 외진 길섶 댓돌 위에 서서 머리 위로 드리운 산사나무 여린 가지 하나를 왼쪽 가슴께로 당겨 잡고 셀폰 사진을 찍었다 떨며 잡고 있는 가지 끝에 짧은 순간 바람이 완강한 소리로 울었다 댓돌 내려서며 손을 놓아 허공으로 돌아간 가지 끝 이파리들의 출렁임이 먼 구름을 배경(背景)으로 차츰 잦아지고 소리만 남겨둔 채 바람은 멎었다 가던 길 이어가는 발걸음은 산사 꽃 흩날리는 전경(前景) 속에 들어갔다 한갓진 이 길섶에 잠시 와서는 소리 깊게 남기고, 바람이 떠난다 이춘 |2013년 계간 『문파』 등단. 시집 『답신』. 제12회 문파문학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신은숙 - 묵호

묵호 언덕과 바다가 내외처럼 낡아가는 동네 언덕 꼭대기 집어등 닮은 쪽창들 간밤 수다를 토해 놓으면 아침 바다 윤슬이 노래로 다독인다 어깨가 내려앉은 논골담 고샅엔 수국이 한창이고 폐가 담쟁이는 마당을 지나 지붕까지 힘줄을 엮는다 살아 푸른 건 거기까지 나폴리도 여기선 다방을 차리고 극장은 종일 필름을 돌려도 '돌아온원더할매' 혼자서 웃고 있다 모퉁이 돌면 고래가 쏟아지고 허공이 따르는 막걸리에 목을 축인다 오징어는 담벼락에서 빨래처럼 말라가고 묵호야 놀자 했더니 용팔아 이놈쉐끼 어매 빗자루가 날아온다 페인트 칠 벗겨진 벽화들마다 마음이 펄럭인다 묵묵히 기다림의 자세로 눈 먼 저무는 등대에 기대 바다를 보면 떠난 애인은 다 묵호여서 눈 감아도 묵호만 보이고 그 이름 부르면 비릿한 멀미 다시는 못 갈 것 ..

[영화이야기] 홍유리 - 코로나 이후의 삶, <퍼펙트 센스>가 말하는 최후의 감각

2020년은 코로나19라는 신종 바이러스와 함께 시작되었다. 공격적인 감염력을 갖고 있는 이 바이러스는 전 세계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선진국들의 방역 체계도 속절없이 무너졌다. 국지전을 제외하고 오랜 기간 평화의 시기를 유지해오던 대다수의 국가들이 총칼과 포탄 대신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적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지리멸렬한 시간 속에 사람들은 이와 같은 위기를 인류가 어떻게 견뎌왔는지 알고자 했다. 카뮈의 『페스트』가 다시 베스트셀러가 되고, (2011), (2013) 등이 감염병 영화들의 역주행을 이끌었다. 우리는 오랜 시간동안 이와 같은 미지의 적에 대한 공포심을 드러내왔다. 영화에서 등장한 대표적인 사례는 조지 로메르의 (1968)을 필두로 꾸준히 제작되어 온 좀비물이다...

재미마당 2020.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