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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김상미 -플래시백

플래시백 수시로 나를 들락거리는 그와 그녀들 그때마다 내 몸에 쌓이는 피 묻은 돌멩이들 그 누구도 의식하지 못한 채 견고한 벽이 되고 나는 오늘도 그 벽에 기대 미처 몰랐던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또 다른 그와 그녀들을 발견한다 그러나 모두가 무한하고 모두가 유한하여 열 배, 백 배, 천 배로 증식해 나가다가도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구름처럼 흩어진다 날이 갈수록 그런 족쇄, 그런 흔적들은 위협적인 사냥개의 특성을 잃고 빛깔을 잃고 각각의 이미지로 각각의 이름으로 되돌아간다 나는 나 그와 그녀들은 그와 그녀들로 원래 그런 관계란 제 자신에게로 쏠린 전망 외엔 언젠가는 모두 바스러질 돌멩이들 나는 상심한 그 돌멩이들을 들어 이미 고된 연마가 끝난 그 관계의 수를 줄이고 그 관계의 온도를 식힌다 ..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시마당] 장석주 - 밤의 별채 같은 고독

밤의 별채 같은 고독 - 자동기술법으로 당신은 지나가는 사람. 무지몽매한 몸으로 떠도는 우리, 우리는 아무 일도 없는 하루를 산다. 오후에 한가롭게 중국차를 마시고 책을 읽을 때, 당신은 다육 식물을 키우는 일에 열심이다. 우리가 서로를 잘 알려면 몇 억 겁의 세월도 모자란다. 천 개의 폐를 가진 밤, 바람이 스칠 때 별은 기침을 한다. 오늘 밤하늘에는 별의 기침 소리로 가득 찼구나! 건강은 인류의 과거다. 방광이 깨끗하다는 건 지독히 외로운 일이다. 외로움은 당신에게만 일어난 존재 사건이다. 외로움이 늘 슬픔을 부양하는 건 아니다. 나는 가끔 담낭에서 시를 끄집어낸다. 고양이는 노조를 결성하지 않는 유일한 야간 노동자다. 김밥 한 줄을 먹고 외투를 걸친 채 산책에 나선다. 눈사람이 서 있는 거리에서 참..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기획특집] 이근화 - 경계에 선 존재들, 그리고 시의 날개

경계에 선 존재들, 그리고 시의 날개 마스크를 쓴 봄이 왔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밖을 내다본다. 어느 아침 아이들은 창밖을 보며 와, 나비다. 나비가 날아다녀요, 그런다. 10층 높이에 나비가? 설마. 흩날리는 벚꽃 잎이다. 그런데 정말 나비처럼 보인다. 제법 환상적이다. 얘야, 그건 꽃잎이란다. 아니야, 나비야. 정말 나비. 이 삶이 갑자기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뿌옇게 흐린 봄의 대기로 폴폴 날아다니는 저건 아이에게 나비로 기억될 것인데, 더 이상 꽃잎이라고 바로 잡지 않았다. 마스크를 쓴 봄조차 실감이 나지 않는 판에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바로잡을 것인가 말이다.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이며 페미니스트인 도나 해러웨이는 인간중심주의 구도를 넘어서기 위해 유인원, 사이보그, 앙코마우스와 같은 혼종적 존..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기획특집] 이병국 - 시라는 장소에 관한 짧은 시론

시라는 장소에 관한 짧은 시론 1. 김수영에 의해 재주도 없고 시인으로서의 소양도 없으며 경박하고 값싼 유행의 숭배자라 평가 절하된 박인환으로부터 시작해야겠다. 박인환은 1926년 강원도 인제군에서 태어나 해방이 된 해에 종로 3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를 경영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시 「거리」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56년 31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전후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하였으나 대체적으로 경박함과 겉멋 든 시들로 센티멘털리즘에 경도된 시인이라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해방직후에 발표한 시들은 대부분 현실 참여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후에 발표된 그의 시를 한국전쟁 경험으로 인한 결과로 도피적 낭만성으로 침잠했다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기획특집] 윤의섭 - 지저귀는 새의 나이

지저귀는 새의 나이 1. 신인-새 시를 쓸 때도 그렇지만 주어진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하는 강박으로 인해 이번 기획특집 주제인 ‘현대시 속에 날아든 새’라는 포괄적인 틀에서조차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나름의 궁리를 통해 나는 ‘날아든 새’를 현대시의 영역 밖에 있는 존재로부터 끌어오지 않고 ‘시인’이라는 문학적 영역에 속한 존재로부터 소환하기로 했다. 이렇게 정하고 나니 우선 2020년대에 들어서서 새롭게 등장한 신인 시인(이하 신인으로 호칭) 몇몇이 어쩌면 ‘현대시 속에 날아든 새’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물론 이 신인-새의 부리엔 시가 물려 있다. 거론할 신인을 떠올려 보다가 실제 ‘새’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가끔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한번도 떠올려보지 못한 의문이다. 대략 알아..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수필마당] 이흥수 - 사월은

사월은 찬란하고 서러운 사월이다. 동면에서 아직 덜 깬 불안한 삼월을 따돌리고 여기 저기 환한 꽃소식과 함께 완연한 봄으로 돌아왔다. 묵정밭에도 새싹들이 파랗게 고개를 내밀고 헐벗은 나뭇가지마다 연녹색 새잎으로 옷을 갈아입느라 분주하다. 누가 사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겨울이 쉽게 물러 설 수 없는지 며칠째 강원도산간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모처럼 피어난 여린 꽃잎들은 화들짝 놀라 서럽게 떨어지고 피멍이 들었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혼란한 세상이지만 사월은 푸르른 오월로 가는 징검다리다. 사월의 바람이 분다. 언뜻 스치는 바람결이 아직도 지난겨울을 내 마음처럼 놓아 주질 못하는 것 같아 애처롭다. 한식날에 함께 가자는 아이들의 말을 뒤로하고 이틀을 못 참고 굽이굽이 혼자 올라왔다. 모퉁이를 돌..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수필마당] 강대진 - 명당

명당 개 짖는 소리 조급하게 들린다. 살기마저 서려 있다. “컹컹” “컹컹” ……. 앞산과 뒷산이 울리고, 집 옆 숲속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던 멧새 떼가 푸르르 날아오른다. 개 짖는 소리만 선명하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해진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아랫도리에 힘이 빠진다. 귀를 쫑긋하여 소리 나는 쪽으로 간다. 축대의 난간이 끝나는 지점에서 개는 너구리를 앞에 두고 맹렬히 짖고 있다. 얼핏 보아도 스키(내가 기르는 개의 이름)의 사냥은 손자병법에 통달한 장수의 솜씨다. 앞마당과 뒷마당을 떠받치고 있는 3m 높이의 축대는 북쪽에서 동쪽으로 굽었다가 다시 남쪽과 서쪽으로 뻗어 오목한 지형을 만들고 있다. 유일하게 트인 서북쪽은 스키가 “컹컹” 짖으며 지키고 있다. 축대의 돌 위에는 미국담쟁이덩굴이 악마의 손처럼 ..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수필마당] 김상미 - 적당한 거리

적당한 거리 코로나가 가져다 준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쪽으로 밀어 놓은 책을 손에 들게 했다. 이따금 읽고 있는 소설의 주인공이 나 같다는 생각이 들어 빠져들었다. 이웃의 삶을 모방하는 소설가들은 충분치 않음을 동원해 거꾸로 자신의 고유한 영토를 늘려간다. 생활력이 강하고 이웃을 자주 깔보는 아낙은 내 어머니 같고 경쟁과 온정 속에서 반목과 친목을 되풀이 하는 사람들은 내 이웃들과 닮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케릭터들은 꾸준히 맥박 소리를 내며 사람답게 군다. 책을 펼친 내 쪽으로 욕망을 안고 절름거리며 다가온다. 허영이 허영을 알아보듯 어떤 악은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아는 체할 뻔하기도 했다. 그들의 절뚝거림은 불편이자 경쾌함으로 다가왔다. 그 엇박자 안에서 어떤 흠은 정겹고 어떤 선은 언짢아 얼굴을 붉히기..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수필마당] 정훈모 - 인생의 그림

인생의 그림 결혼 47주년이라 삼척으로 여행을 갔다. 코로나 19로 세월이 수상한데 내 옆의 현실에서도 기막힌 슬픔을 바라보아야 하는 일이 생겼다. 외손녀가 갑자기 아파서 마음을 졸였다. 손주들이 방학이 연기되어 집에 있으니 두 아이들 돌봐주는 것도 힘든데 나들이를 못하니 답답해해서 떠난 여행이다. 동해 바다는 여전히 거기서 많은 말을 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삶이 견딜 수 없고 힘들 때 ”여행은 마음껏 할 수 있다’는 말이 가슴으로 훅하고 들어왔다. 항공사에 다니는 남자의 말이니 가능할 것 같았다. 20대 초반, 사는 게 녹녹치 않아 방황하고 있을 때 일간지의 ’오늘의 운세‘를 즐겨 찾아보곤 했다 그러다 “ 동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날 수 있다.”라는 문구를 보는 날은 은근히 누가 귀인일까 하며 ..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수필마당] 유혜자 - 당신의 벤치는

당신의 벤치는 거리를 지나노라면 곳곳에 놓인 벤치를 만날 수 있어서 나이든 처지에 반갑기 그지없다. 우리 아파트 입구에도 푸른 벤치가 놓여 있어서 들고 날 때마다 학창시절 동급생의 시구(詩句)가 생각난다. 맨 먼저 누가 꽃을 불러주면/꽃은 /터질 듯 분홍 손수건에 싸여/푸른 벤치로 다가간다./꽃은/우리가 가장 아파하고 우리 제일 서러워하는/… -w시인의 중 재학 중 시인으로 등단하고 예쁜 클라스메이트와 캠퍼스 커플로 알려져 주위의 부러움을 샀던 이 시인. 나는 이 시가 우수한 시로 평가받은 내용보다도 푸른 벤치라는 단어가 참신하여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 벤치는 서 있거나 오래 걸어서 피곤한 사람이 쉴 수 있고 의자와 달리 복수로 수용하여 만남의 장으로 대화가 허용되는 곳이기도 하다. 거기다가 푸른 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