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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신현락 - 부름

부름 어느 시간의 부름이 있어 구름 저편으로 연하게 밝아오는 초벌의 아침하늘에 출사표를 던지는가 저공을 귀얄처럼 쓸고 가는 날갯짓 소리 떼로 날아가는 기세 자못 힘차다 대륙간비행에 비책이 따로 있다고 해도 활공에는 간결한 비법이 상책인 것 가끔 어린 울음의 먹물을 뿌려놓고 오로지 돌아갈 때와 날아갈 지평선만 아는 바람의 붓질로 이어가는 운필의 전상서는 오직 극지에서만 받아볼 수 있다 저마다 깃 푸른 일심으로 가고 또 가는 것을 뜬구름 하나 사라진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기러기는 혼신의 힘으로 갈라지는 붓끝을 부여잡고 필생의 필치를 뿌리며 가는 것 어느 예인이 있어 떠오르는 해로 천명의 낙관을 찍을 수 있는가 기러기 날아간 구름 저편 하늘의 어디에도 소실점이 없다 신현락 | 1992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당..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김규은 - 백차를 기뻐한다

백차를 기뻐한다 찻잎에 빗방울 소리 대숲 흔드는 바람에 밀리듯 묻지도 않고 뛰어든 쭉나무 집 할머니 웃으신다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건네 주시는 수건 햇살내 나는 듯 고실고실 한데 닳아 뭉뚱한 손 마디가 눈에 밟혀 마음 쓰인다 일상인 듯 능숙히 따루시는 차 한 보시기 맑고 순한 백차(白茶)다 기뻤다 덖고 비비지 않아도 그윽한 향미 잎으로 피기 전 털복숭이 여린 속속잎을 저리 무뎌진 손끝으로 어찌 거두셨는지 자꾸 눈길이 가는데 훈김 나는 다향에 끌려 시린 눈 고쳐 웃으며 웃음 웃는 할머니의 손을 붙안고 순한 순수에 내가 잡힌다 덖고 비비지 않아도 그윽한 다향 백차를 기뻐하며 김규은 |1991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냉과리의 노래』등.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미래시시인회 회장, KBS 아나운서 역임.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함성호 - 물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 소쇄원(瀟灑園)에서 서로 폐 끼치며 사는 거다, 이 화상아 자미탄이 백일홍의 그림자로 여인의 붉은 치마처럼 너울거릴 때 어느 저녁은 올 것이다 그 저녁이 오면 모두의 선의를 뿌리치고 간 너도 어느 강변쯤에는 가 있겠지 나는 제월당에 누워 쥘부채를 멈추고 왼쪽 귀에는 계곡의 물소리를 담고 오른쪽 귀로 대숲의 바람소리를 흘린다 이 원림은 은근히 관능적이다 오곡문 담장 위를 타고 오르는 해찰 맞은 바람처럼 생은 통째로 개 혓바닥 같이 숨찬 것이었느냐? 나는 모르겠다 소쇄/소쇄/소쇄/소쇄/소쇄 춘삼월의 바람이 대숲을 쳐 靑竹春光에 날리는 저 대이파리들의 장하게 잎 부비는 소리를 듣는다 아아 너는 어느 개여울에 앉아 울고 있는 것은 아니냐, 우리가 지나온 그 좋았던 날들이 먼 수평면상의 궤적..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성윤석 - 삼월의 눈

삼월의 눈 눈이 왔을 때 삼월의 매화는 간지러운 듯 입 거품 모양이 되었다 눈이 왔다 눈이 내리는 나라가 아니라 눈이 내리는 동네에서 사람도 간지러운 듯 옆에 걷는 일행의 어깨를 털어준다 눈이 내리니 세상이 꽉 차는 느낌이다 나라까지는 필요 없다 눈이 내리니 아무도 침범 않는 눈이 내리는 동네면 괜찮은 밤이 온다 각자의 방에서 그녀는 발표도 하지 않을 소설을 쓰고 있다 쓰는 일은 기타를 치다 마는 것과 같은 일인가 눈이 내려서 삼월의 홍매는 입 거품을 내밀었다 이게 뭐지? 하는 건 다 운명에 가까운 거였다 성윤석 |1990년 『한국문학』 등단. 시집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 『공중묘지』 『멍게』등.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박라연 - 어느 저녁에

어느 저녁에 새봄이 저물어 가는데 지난 가을의 국화시체들을 수습하는 시간 방치된 국화들의 뼈아픈 순간들을 화장시키는데 내 뼈아픈 시간들이 염치 좋게 타들어갑니다. 타닥타닥 떠도는 세상의 뼈들이 함께 타들어 가는데 어머니들의 향기가 낭자합니다 바람이 나의 후회를 멀리 아득하게 데려갑니다. 땅의 시간 속에서 어서 나오겠다, 와 끝까지 서 있어주겠다, 속에서 옥신각신하던 오늘의 해는 저물어, 저물어 내 인생도 저물어, 저물어 가물가물 그저 아름답습니다 박라연(朴蓏娟) |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빛의 사서함』 『노랑나비로 번지는 오후』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 등. 2008년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 2010년 박두진 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문학부문 대통령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김선진 - 아직도 내가 못가는 까닭

아직도 내가 못가는 까닭 내가 믿는 건 당신이 알겠기에 귀엣말이 아니래도 짐작하실 테죠 날이면 날마다 감춰도 비집고 나오는 하얀 서리로 엮어져 내리는 기다림 어릴 적 소꿉놀이 헝겊 조각보 정직한 그리움의 깃발 만들어 세상사람 모르는 무인도로 고동만 불면 떠나갑니다 그러나 아직도 여물지 않아 사나운 짐승울음 바다 다스릴 길 없어 돛대도 아니 달고 미처 노도 내리질 못해요 내가 믿는 건 당신이 알겠기에 귀엣말이 아니래도 기다리실 테죠 아직도 내가 못 가는 까닭을. 김선진 | 1989년 『시문학』 등단. 시집 『끈끈한 손잡이로 묶어주는 고리는』 『촛농의 두께만큼』 『숲이 만난 세상』. 시선집 『마음은 손바닥이다』. 산문집 『소리치는 나무』. 한국현대시인상, 이화문학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정숙자 - 백구과극

백구과극(白驅過隙) 가드레일에 죽은 고양이가 걸쳐져 있다 어쩌다 저리 됐을까 누가 가져다 저래 놨을까 ……확인한 바 플라타너스 몇 잎이 말라붙은 나뭇가지였다 태풍에 찢겼나 보다 소용돌이치다가 끼었나 보다 작신 허리 꺾인 포즈를 하고, 너는 푸른 숨을 거두었구나 갈색으로, 검정으로, 아니 고양이로 변신했구나 난 풍장이 좋아 이 길과 저 하늘과 해 질 녘이면 늘 걸어오는 그대들의 말소리와 숨소리, 발자국 수북한 이 길을 나는 끝내 택했어, 라고 말하지도 못하는 내 길동무, 한번 눈여겨 봐주지도 않았던 이파리들 가운데 한 잎이었던 잎, 무음이 돼버린 이제야 입 이 시대에 건성으로가 아니라 진정으로, 어둠으로 시를 쓰는 몇몇 시인이 있다 이 시대에 그 몇몇 시인이면 족하다 정숙자 |1988년 『문학정신』 등단...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김완하 - 각주구검

각주구검(刻舟求劍) 어머니 가신 가을 감나무는 낙엽을 떨구다가 마지막 한 잎은 더 곱게 물들여 남겨 두었다 까치밥 아래 뒷산으로 난 길 가장 깊은 뿌리 위로 내려놓았다 다음 해 봄 그 잎이 닿은 뿌리 제일 가까운 곳에서 맨 먼저 새 잎이 눈을 뜨고 일어나 어머니 소식을 가져 왔다 김완하 |1987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 『길은 마을에 닿는다』 『허공이 키우는 나무』 『집 우물』 등.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대전시문화상, 충남시협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