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366

[작가가 좋아하는 작가] 추한 것이 아름답다, 툴루즈 로트렉

Editor 박미경 아침, 식당에서 수프를 한 스푼 들이마신 어머님이, “아.” 하고 나직이 소리를 지르셨다. “머리카락인가요?” 수프에 뭐 언짢은 게 들었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아아니.”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 스푼 훌쩍 입속에 흘려 넘기시고, 딴 생각을 하는 듯한 조용한 얼굴로 옆으로 향하여, 부엌 창밖에 만발한 산벚꽃을 쳐다보셨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사양斜陽』의 첫머리다. 수프를 마시는 어머니의 기품을 묘사하면서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천작天爵’-하늘이 내린 작위를 가진 사람으로 찬탄해 마지않는다. 자식에게서 천작을 받았다는 평가를 받다니… 그 인상적인 풍경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후에 툴루즈 로트렉의 (1882)을 보던 순간 영화처럼 다자이 오사무 소설 속의 어머니가..

재미마당 2020.05.26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기획특집] 전소영-발치에서 출렁이는 미래

발치에서 출렁이는 미래 - 포스트휴머니즘의 인간학 업그레이드(upgrade)된 자는 누구인가 선택지가 없었다. 없었다고 여기는 편이 종내 그에게는 나았을 것이다. 별안간 정체 모를 괴한의 습격을 받아 아내를 잃고 자신의 육체마저 출구 없는 마비에 감금당했을 때, 그는 최첨단 두뇌인 AI ‘스템’을 소형 칩으로 이식받았다. 목적은 당연히 복수. 스템은 그의 뇌리를 나눠 쓰며 상상 너머의 위력을 몸으로부터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그 덕에 그는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악인들(이라고 믿었던 자들)을 처단할 수 있었다. 신체적 결핍의 보완 차원을 넘어 인간으로 하여금, 정말이지 끝없는 잠재력을 발휘하게 하는 스템의 권능은 처음엔 놀라움으로, 후엔 두려움으로 보는 이를 황망하게 한다. 그러다 두려움이 확고해지는 순간,..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기획특집] 최연구-AI시대의 문화와 인간

AI시대의 문화와 인간 이세돌 vs 인공지능, 세기의 대국 인간 바둑 챔피언 이세돌은 지난 2016년에 이어, 2019년 연말에 다시 한 번 인공지능(AI : Artificial Intelligence)과 세기의 대결을 벌임으로써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이른바 ‘알파고 쇼크’라고 불리는 2016년의 대국에서 이세돌 9단은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에게 1대 4로 대패했다. ‘인간 vs 인공지능의 대결’에서 패한 이세돌은 당시 인터뷰에서 “이세돌이 패한 거지 인간이 패한 건 아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어쨌거나 그는 난공불락의 인공지능을 상대로 기적 같은 한 번의 승리를 거두었고, 이 승리는 인간이 인공지능 알파고를 이긴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됐다. 그로부터 3년 반 후, 이세돌 9단은 자신의 은퇴를 선언하면서..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수필마당] 반승아-만종: L'Angélus

만종: L'Angélus 밀레의 그림 은 제목이 참으로 적절하다. 저녁나절의 종소리에 맞추어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은 소박하지만 경건하고, 겸손하지만 굳건하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어디에선가 뎅, 뎅 하는 낮고도 묵직한 종소리가 해질녘의 공기를 가르며 들려오는 것만 같다. 사실 이 그림의 원래 제목인 L'Angélus는 ‘삼종기도’이다. 삼종기도는 천주교에서 아침 6시, 정오, 저녁 6시에 바치는 기도이다. 삼종기도는 당시 시계의 역할도 대신했을 것이다. 분초를 다투며 살지 않던 시절, 사람들의 삶은 순박하고 단순했으리라. 날이 밝으면 일어나고 해가 중천이면 잠시 쉬고 어스름이 내리면 긴 그림자와 함께 집에 돌아오는 삶. 자연이 알려주는 흐름 속에 그 일부로서 살아가는 삶. 일용할 양식을 주신 신에게 감..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수필마당] 김세희-사랑한다면

사랑한다면 하늘이 깊어지는 계절의 문턱에서 그들은 우연히 만났다. 인연이 악연이 되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자연에서 맘껏 날아다녀야 할 장수풍뎅이는 벽돌 두 개 정도 펼쳐 놓은 크기의 방에 갇혔다. 여덟 살 천진난만한 아이가 자유를 갈망하는 곤충의 눈빛에는 관심이 있을 리 없다. 열 네 번의 낮과 밤이 반복되었고 아이는 큰 결심을 했다. 장수풍뎅이를 데려왔던 자연휴양림에 방생하니 숲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여덟 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장수풍뎅이는 자연으로 돌아가 흙이 되고 바람이 되었을 것이다. 진정 사랑한다면 상대방이 원하는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울고 있는 아이의 눈동자에서 아버지를 잃고 슬퍼하던 나를 발견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여름부터였다. 엄마..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수필마당] 김숙경-겨울 광교산

겨울 광교산 바람 소리가 파도 소리를 낸다. 텅 빈 나무 위에서 나는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다. 발목을 덮고 있는 낙엽과 잔설이 아직도 먼 봄을 기다리고 있는 듯싶다. 내가 사는 곳에 험하지 않으면서도 아늑하고 나지막한 산이 있다. 수원 시민이라면 한번쯤 손짓하는, 거부하지 못해 찾는 그런 산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광교산을 병풍 삼아 자리 잡은 우리 동네를 사람들은 축복 받은 일이라고들 한다. 공기처럼 가까이 존재하는 것에 감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도 그저 그런 산으로만 기억했다.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산으로만 알았는데 유명세를 치룬 듯 하루가 다르게 산을 찾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뒤꼍에 자리 잡은 산처럼 여겨지는데도 마음먹지 않으면 산에 오르는 일은 쉽지가 않다. 남편과 큰마음을 먹고 오랜만에 둘만..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수필마당] 곽영호-기억의 그림자

기억의 그림자 어둡고 긴 겨울밤과 씨름을 한다. 어두움의 두께가 무시루떡처럼 두껍고. 뱀의 고리처럼 가뭇없이 길어 지루하기가 그지없다. 한 잠을 자고 났는데도 밤은 아직이다. 설친 잠에 끝없는 허무의 바다를 헤맨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했다. 젊은 날 그토록 모자라던 잠은 어디로 가고 힘겹게 건밤을 지새운다. 선하품 몇 번 하다가 그만 또다시 살얼음처럼 얇은 잠이 사르르 들어 꿈을 꾼다. 되돌아갈 수도 없는 시절의 공간으로 들어가 지난날의 보잘 것도 없고 아쉬움만 남는 기억이 흐늘거린다. 초등학교 때 교정이 단골 꿈길이다. 생시처럼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어둠침침한 긴 복도며 무섭기만 했던 선생님들의 교무실은 꿈속에서도 찔끔한다. 뒷마당 우유가루 끓여주던 자리가 제일 크게 보인다. 단추 없이 배를 ..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한재범-오프사이드

오프사이드 오래 사귄 친구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징그러운 말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우린 매일 오래된 동네 피시방에서 만났지 흡연석 마주 편에서 코를 막고 게임했지 좋아하는 선수들로만 팀을 짜는 축구 게임 각자의 열한명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좋아했다 우린 서로의 유일한 라이벌 골키퍼와 골대를 욕하면서 치고받았다 네 골키퍼 정말 미친 것 같아 노이어도 그렇게 막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뭐래 더 좋은 팀 쓰는 주제에 작년 여름 우리나라가 독일을 이겼지 나도 기뻤어 나도 우리나라 사람이니까 게임에선 독일 국가대표를 썼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손흥민의 군 면제를 모든 국민이 원했지 너도 그 국민 중 하나였을까 지금 너는 군대에 있다 말뚝을 박겠다고 네가 은퇴할 때쯤이면 손흥민도 그라운드에서 은퇴를 하겠지..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정재율-사랑만 남은 사랑 시

사랑만 남은 사랑 시 읽다가 책을 덮었다 사랑이 모자라서 눈들이 깨끗해지기 위해 창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더 많은 사랑을 위해 창문을 그렸다 컵을 던져도 깨지지 않는 책장에 쌓이는 먼지처럼 손으로 쓸어도 날아가지 않는 풍경들을 뒤로 한 채 겨울이 되면 재가 흩날리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창문에는 죽은 생명체들이 입김처럼 불어나고 덕지덕지 얼룩들이 생긴다 컵을 던지면 분명 손잡이가 깨졌는데 멜로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사랑에 실패해도 다시 새 삶을 살 수 있었다 더 청렴해진 마음으로 빗방울을 그렸다 붓과 물감으로 더 자세하게 그렸다 사랑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사랑을 하고 싶어서 열심히 창문을 닦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써진 편지를 발견했다 턱을 너무 오래 괴어 팔꿈치가 아파왔다 새 구절을 ..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이만영-나와 당신과 레인코트

나와 당신과 레인코트 여름 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목록 중 비의 냄새만으로 장밋빛 잠에 취하게 만드는 비법을 알고 있다고 당신은 깔깔거린다 노란 레인코트의 당신을 본 그날 이미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고 여름의 와인 잔 속으로 알몸을 텀벙텀벙 빠뜨리며 거짓말처럼 이 계절이 영원히 끝나버리지 않기를 바랐는데 나와 당신과 레인코트 그리고...... 미안해, 뭔가 썩 어울리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어 레인코트를 걸친다는 건 빗방울 소리로 세상을 뒤덮는 일이고 축축한 시선의 무단침입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했지만 숲으로 빚은 바람과 먼바다를 스쳐온 바람의 차이만큼 처음부터 우리 태생이 달랐던 건 아니었을까? 가끔 당신은 레인코트 대신 우산을 집어 들곤 했지 나는 더러워진 레인코트를 분리수거함 통에 구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