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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이영주-삶의 계략

삶의 계략 아무도 없는 데, 전등이 켜졌다, 누구세요? 라고 묻고, 누군가는 웃는다, 이 가벼운 입김은 뭐지, 멀리서, 누군가가 현관을 보고 있다, 누구세요? 발은, 방으로 들어간다, 이 문턱은 깊게 훼손되어서, 아무나 들어올 수 있어, 아무도 없지만, 누구나 들어와서, 뭉개진 발을 올려놓지, 멀리서, 진물이 흐르는 문턱을, 누군가 보고 있다, 조용히 여기까지 걸어왔네, 아무리 가벼워도, 절룩인다 절룩여, 화농이 부풀어 오르고…… 아무도 없는데, 이런 권태감은 무엇이지, 매번 문턱이 있었고, 닳아 없어졌고, 수 만 개의 입김이 둥둥, 그때마다 하급신은 바닥인 인간보다 더 힘이 없지, 전등은 켤 수 있지만, 짓눌러진 발이, 문턱에 걸쳐, 흐르고 있지, 오랜 시간, 나는 걸어오며 갱신되었습니다, 너무 뜨거운..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정영주-겨울 강에 손을 넣고

겨울 강에 손을 넣고 겨울을 버티기 위해선 알몸을 투명하게 얼려야 한다지 껍질을 단단히 세워야 속살을 견딜 수 있으니까 맹렬한 바람과 눈보라를 비껴서 안으로 깊숙이 흘러야 전부를 잃지 않으니까 마침내 무수히 작은 물의 혀들이 단단히 언 제 몸을 핥기 시작하지 가장자리부터 안쪽 깊숙이 온기로 닿는 바람결을 따라 온몸을 혀로 녹여내는 거야 가장 아름다운 소리의 여울들 한숨처럼 들고 나는 저 가난한 혀들의 헌신들 나의 언 손이 가까스로 강물에 닿는다 나의 삶 어느 구석에 저런 시린 헌신이 있었는가 흐르고 싶지 않아, 누구에게도 젖어 들고 싶지 않아 먼 길 에돌아 와서 내 깊은 곳까지 꽝꽝 얼어버린 단단한 강을 본다 봄은 어린 강을 껴안고 언 몸들을 하염없이 녹이는데 나의 봄은 어디 있는가, 시린 손에 묻은 물..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임솔내-홍랑, 홍랑, 홍랑

홍랑, 홍랑, 홍랑 세월 깊어 손 전화 방전 됐거들랑 손 편지 걸어주오 묏 버들 꺾은이여 햇 봄 찾아와 붉은 입술 *청앵도 들리면 맨발로 뛰어가 와락 그대인가 여길터니 *김홍도의 그림 「마상청앵도」에서 따옴 임솔내 |1999년『자유문학』등단. 시집 「나뭇잎의 QR코드」「아마존 그 환승역」「잠을 깬 아마존의 함성」등. 영랑시문학상, 한국문학비평가협회상, 한국서정시문학상 등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김지헌-징후들

징후들 해발2700m 알프스 피졸산 정상 검은 옷의 조문객들이 모여들었다 오늘의 망자는 피졸 빙하 사인은 지구온난화 빙하학자 마티아스 후스는 어두운 표정으로 추도사를 낭독했다 장례주관자 에릭 페트리니 사제는 기도문을 읽고 일부 조문객은 빙하의 흔적만 남은 말라버린 땅에 꽃을 바쳤다 마지막으로 주민들은 알펜호른을 연주하며 애도했다 이보다 앞서 아이슬란드에서도 700살 된 빙하의 장례식이 열렸다 남은 빙하들도 200년 내에 모두 사라질 것으로 예측 한다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밀이 열리며 실종된 가족을 찾기도 했으니까 냉동인간을 꿈꿨을까 전갈이 들어가 있는 호박 보석처럼 냉동인간을 장식으로 넣은 빙하라니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빙하의 장례식이 열리는 곳마다 재빨리 달려가 잠복된 비밀을 경매에 붙일지도..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홍금자-시인의 설계도

시인의 설계도 눈을 뜬다 여린 바람 한 줄기에도 계절의 그림자 밀어두던 젊은 날 근육질의 시간들 이제 햇살 좋은 날에도 자꾸만 오래된 이름들과 돌아갈 수 없는 날들 가뭇거리는 기억들 생살처럼 외롬 타는 문장은 운명처럼 썼다 지웠다 다시 노을로 물드는 그림 한 장 시집 빼곡한 서점 앞에서 펼쳐 보이는 시인의 설계도. 홍금자 |1987년『예술계』등단. 시집 「그리움의 나무로」「유년의 우물」 「외줄타는 어름사니」등. 윤동주 문학상, PEN문학상, 월간문학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장순금-회전목마

회전목마 낡은 말들이 할아버지의 바닥을 떠받치는 가족이다 한낮엔 꿈꾸는 아이들을 구름위에 앉히고 달빛 기우는 저녁은 한 시절 발굽 실족한 기슭이 깊어 혼자 눈 뜨는 미명, 머리 위로 무수히 낙엽이 떨어졌다 이탈한 중심이 어린 새떼들 날려 보냈고 허공에 날개 돋은 청맹과니, 뼈만 남은 목마에 앉았다 순환선 천리를 달려도 어제와 시간은 좁혀지지 않아 중력을 잃은 궤도는 매일 밤 불안에게 등불을 켜준다 꽃은 피고 아이들 노래 소리 하늘 오르내리고 목마도 언젠가는 갈퀴 휘날리며 하늘 달릴 거라 거리에서 음악소리 크게 아이들을 부른다 장순금 |1985년『심상』등단. 시집「햇빛비타민」「골방은 하늘과 가깝다」등. 동국문학상, 한국시문학상 수상. 경기문화재단 우수작가 지원금 수혜.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차옥혜-장미의 가시

장미의 가시 장미를 그냥 그렇게 반짝이게 하여라 그냥 그대로 바람에 흔들리게 두어라 장미가 어여쁘다고 장미를 꺾는 순간 가시에 찔린 그 사람 장미가 불온하다고 장미를 뿌리 채 뽑아 불 지른다 장미의 가시는 장미의 자존심, 방패, 지킴이 정당방위 장미는 자신을 받쳐 주는 땅에게 감사하며 자신과 보이는 모두를 사랑했을 뿐 오직 제 존재만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했을 뿐 차옥혜 |1984년『한국문학』등단. 시집「깊고 먼 그 이름」「숲 거울」「씨앗의 노래」등. 경희문학상, 경기PEN문학대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김명리-과녁

과녁 눈 펑펑 내리는 날 겨울 골짜기의 나무들은 이름이 없다 이름을 벗는다 환원이어도 좋고 표백이어도 좋다 수렴이면 어떠리 눈뭉치들이 바람개비처럼 돈다 뭉개진 과녁이 금세 또 생겨나는 소리 눈물이 눈물 위로 얼어붙는 소리 동서남북 팽팽한 저 격발의 힘 조각자나무의 가시마다 또렷이 얹힌다 김명리 | 1984년『현대문학』등단. 시집「물 속의 아틀라스」「물보다 낮은 집」「적멸의 즐거움」등.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이영춘-겨울새들의 편지

겨울새들의 편지 어느 시인은 아픈 동생의 몸이 겨울처럼 깊어진다는 소식이고 한 시대를 풍미하던 여배우는 자신의 딸도 몰라본다는 기사가 문풍지를 흔드는 아침이다 은행 앞에서 푸성귀 팔던 할머니는 한겨울은 다가오는데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며 풀잎처럼 고개 떨구고 두 손끝 호호 분다 오십 대 중반 퇴직한 후배는 학교 앞 골목길에서 밥장사하다가 월세 낼 벌이도 안 돼 보증금만 날린 채 가게 문을 닫고 가게 문처럼 덜컹거리는 심장을 앞세우고 기러기로 떠돌고 있는데 보도블록은 말없이 귀를 세우고 비밀의 통로인 양 세상 이야기들을 삼키고 있다 리어카 사과 장수는 간밤에 사과가 다 얼었다며 사과 같은 두 볼을 쓸어내리는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한쪽 귀 닫고 감- 감- 아득한 나라 저편, 아득한 달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