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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박성현 - 빙하기

빙하기 당신 두 눈에 서려 있는 얼음이, 먼 하늘로 스며들다 지쳐 우두커니 서 있는 노을 같았습니다 마음만 움켜쥐고 얼어버린 거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살얼음 졌으니 오늘만큼은 물러설 곳이 생긴 거겠지요 그렁그렁 남은 햇살을 손바닥으로 쓸어 모으고 가루약을 털어 넣듯 삼켰습니다 팔다리에도 얼음이 끼어 있을까요 당신은 자주 갸릉거렸습니다 밤새 뒤채면서 뜬눈으로 새웠습니다 매일 엄마의 먼 곳이 그리워 울다가, 울음까지 내려놓기는 서러워 마음만 얼렸던 걸까요 얼어붙은 마음이 며칠이고 몇 달이고 계속되는 밤이었습니다 불투명한 얼음도 당신 것, 그러니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 그 두껍고 어두운 곳에서 당신을 녹일 햇살의 울음을 기다려야겠습니다 박성현 | 200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유쾌한 회전 마..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신미나 - 은하수와 청혼의 밤

은하수와 청혼의 밤 우리는 나아간다 밤의 한가운데로 호두를 반으로 쪼개 속을 파내고 호두껍데기를 타고서 이것은 방주 우리는 들어간다 밤의 길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속으로 오른 눈에 기쁨의 왼쪽 눈에 슬픔의 대천사를 보게 된다면 한쪽 눈은 감은 채로 떠내려가도 좋다 소음을 빨아들이는 공기의 순수한 에너지 공중에서 행성의 고리처럼 빛나는 반지의 둘레 원의 바깥에서 괄호가 되어 퍼져나가는 물결의 분위기를 이해한다면 키를 돌려 회전하는 별자리를 보았다면 당신은 그것을 사랑이라 불러도 좋다 신미나 |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싱고, 라고 불렀다』.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김문주 - 시창작교실

시창작교실 - 은유에 관하여 한 계절이 방안에서 지나는 동안 꽃은 피고 관객 없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나는 방안에서 여전(如前)한 선생이었다 그 말을 하지 말 걸 그랬나 또 시간을 넘기기도 하고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꺼내놓기도 하다가 천변(川邊)을 걷는다 시인은 잘 보는 사람, 견자(見者)이기도 하고 잡풀이 우거진 택지지구 한편에서는 철골 건물들이 올라가는데 물가에서 잠맥질하는 오리들. 비유는 너머를 보는 능력 도대체 이곳은 어디일까 흰 복면을 하고 천변을 걷는 사람들 돌아온 방안에서는 강의도 어느새 끝이 나고 학생도 선생도 없는 피안(彼岸)의 교실 모니터 앞에서 나는 옛날처럼 생각이 많고 그 학생들은 저마다 사라져서 바깥은 온통 초록의 세상 김문주(金文柱) | 2007년 불교신문 등단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박서양 - 코로나 블루 2020 봄 편지

코로나 블루 2020 봄 편지 담장 밑 개나리 하마 어지럼증 담벼락에 철퍼덕 기대고 있노라 했다 산 중턱은 지천으로 깔린 진달래 피눈물 범벅 붉은 슬픔 칠갑을 했노라 했다, 목련나무 둥근 눈물 폭죽처럼 터뜨리다 상한 심장 쓸어내리며 땅 밑으로 한없이 추락하고 있다고도 했다 기꺼이 어김없이 봄을 피워 내고도 비극의 달이라는 낙인들 겹겹이다 몸 둘 곳 모르고 웅크린 4월 고막 찢어져라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에 이리저리 몸서리치며 나뒹구는 공포의 버석거림, 그리고 쓸어 모아 눌러 담은 구덩이마다 처철 하게 부서지며, 생존 포기하는 검은 낙엽들 천지사방엔 늘어만 가는 처연한 몰락의 페이소스 검은 무덤들 19세기말 군중들에게 살해당했던 神 부활 이후 가장 침통한 표정 암울한 얼굴로 뚜거덕 뚜거덕 걸어오고 있다 박서..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백미숙 - 면회사절

면회사절 앵앵 울어대며 앰뷸런스가 쌩쌩 달렸다 산소호흡기로 가쁜 숨 헐떡거리는 남자를 껴안고 숨도 쉬지 못하며 달려온 종합병원 응급실, 살얼음 한기가 빙하의 얼음물을 끼얹은 듯 질식할 것 같은 집중치료실에서 새빨간 적혈구가 한 방울씩 떨어지며 남자의 나무등결 같은 살갗 속 실핏줄을 타고 얼어붙은 몸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성급하게 달려오며 빨리 밖으로 나가주세요, 거칠게 여자를 밀어내는 의사의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면 회 사 절 굳게 닫혀버린 문에 붙어있는 까만 네 글자를 보며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제발 그 사람 좀 살려 주세요 은사시나무처럼 하얗게 질려있는 가냘픈 그 여자는 생피를 토해내듯 울부짖으며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을 맞은 까치처럼 뼛속을 파고드는 놀라움과 슬픔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버..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송승환 - 테이블 Ⅱ

테이블 Ⅱ 그녀는 호텔 복도 끝에 앉아있다 내 붉은 머리칼을 향해 손을 뻗는다 나는 반대편 복도 끝에 서 있다 그녀의 벌어진 입술을 바라본다 12,756㎞ 테이블 사이에 두고 우리는 함께 있다 송승환 |2003년 『문학동네』 시 부문, 2005년 『현대문학』 평론 부문 등단. 시집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 『클로로포름』 『드라이아이스』 등.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변이수, 박이영 - 3점 슛의 방랑은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 모른다

3점 슛의 방랑은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 모른다 맨발이 사회적 거리를 줄인다? 설득된 멜로디 소모된 은유이거나 달콤한 디저트 멀지 않은 곳에서의 풀 샷 꿈이 좋은 날의 사막은 달 속에서 잠을 잔다 편견의 가계도 큰 발의 규칙 신기루를 향해 뛰고 있다 잉여의 건포도알 대화창을 걸어둔다 목소리의 오차가 너무 커 노틀담의 곱추는 잠시 사라졌다 장애물이 길이 되는 무너진 대성당 거울 가까이 미사를 옆에 끼고 하느님의 모퉁이를 돈다 불면의 거리 폭풍고음 전력을 다한다 야자수, 의자, 스크래치 난 파도, 도미노 블록이 쓰러진다 나이프의 반란 팬데믹 출구가 없다 빛 속의 견과류 깨달음이 단단하다 아무도 열어보지 않는 지도 꽃의 거짓말이라 적는다 * 참여 작가: 빛과 터널의 화가 이채현 화백. * 이 시편은 2인 공동창..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이병률 - 면역

면역 서로 가까이도 말며 말하지도 말라며 신(神)은 인간에게 채찍 대신 마스크를 나눠주었다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였을까 입을 가만히 두라는 뜻이었을까 소리를 들리게 하지도 말며 소리를 내지도 말라며 사람들을 향해 사람들은 두 번째 손가락을 세웠다 서로 얼굴을 비벼도 안 되고 국경은 넘으면 안 되고 잔재미들을 치워놓으라 했다 나눠 먹을 수 없으니 혼자 먹을 쌀을 씻었다 서로 떨어져 있으라는 신호에 재조립해야 하는 건 사람이었다 마스크 안에서는 동물의 냄새가 났다 어떤 신호 같은 것으로 체한 사람들이 집 바깥으로 나가기를 참아야했던 시절 몇 백 년에 한 번 사랑에 대해 생각하라고 신이 인간의 입을 막아 왔다 계절이 사라진 그해에는 일제히 칠흑 속에 꽃이 피었다 공기에 공기를 섞어봤자 시절은 시들어갔다 사람들은..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권현형 - 홍차를 함께 마시자고 말하고 싶었다

홍차를 함께 마시자고 말하고 싶었다 아직 감자는 익지 않았고 공복의 저녁은 위태롭다 별과 인간의 시간 사이에서 누군가 밤으로 입장하는 걸 망설이고 있다 먼 훗날의 일이 그립다 1400광년 동안 빛의 속도로 날아가 네게 닿는 건 기약할 수 없는 일, 감자가 익기 전의 일 긴 펜대를 사용해 전하고 싶은 말은 쿠르드족이 타고 다니는 노새의 허리를 닮았을 것이다 고단한 소금 자루의 하루를 견디느라 취한 말이 비틀거리며 만년설의 저녁을 건너가고 있다 문득 올려다본 구름이 문자나 문장 같을 때가 있다 오늘 구름을 잊지 않을 것이다 한쪽뿐인 날개가 되었다가 허리가 긴 펜대가 되었다가 설원에 찍힌 말 발자국이 되었다가 서랍 속 마른 꽃이 되었다가 갈피를 잡지 못해 병이 깊어간다 사선으로 잘려나간 채 가슴에 붙어 있는 ..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신영옥 - 굴뚝 재, 저 푸른 옷자락이

굴뚝 재, 저 푸른 옷자락이 가는 길은 멀고 험해도 오를수록 부드러운 푸른 옷자락 펄럭이며 반겨주는 산이 좋아라. 2020 올 봄, 코로나19가 세계국경을 넘나들며 사람만을 괴롭히는 바이러스 세상 허허로운 마음 받잡고 찾아온 내가 넘은 굴뚝 재 그 옛날 성황당은 오간 데 없고 그렇게 높고 높던 산 고개가 지금은 푸른 숲 우거진 고속 도로 변 1950년 6.25 쳐내려오는 인민군 따발총소리에 가방 하나 둘러메고 피난민속에 묻혀 황급히 넘어가던 고갯길 정상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온몸으로 막아서던 국군들의 혈투 오늘이 그때인양 70년 사무친 가슴이 쓰리다. 천지 가득 피어나는 꽃들의 향연에 버들강아지 진달래 개나리 생강나무 꽃동산 다람쥐 노루 고라니 토끼 뻐꾸기 산 까치 지저귀는 산새소리 작은 골짜기를 적시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