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 35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서정학-지하은행

지하은행 길 건너편 상가 지하 2층에 은행이 있다. 낡은 문을 밀며 들어서면 지하 특유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꾸깃한 지폐 냄새가 섞여, 무덤 같은 어둠과, 그 속에 붉게 빛나는 눈들이 있다. 매일 청소를 하지만 거미줄에는 노란, 줄무늬가 무서운 거미들과 천장의 석류램프에는 이따금씩 나방들이 뛰어들어 터지는 비명이, 들리고 매일 청소를 하지만 바닥은 끈적거리는, 늪의 습기와 썩어들어가는 나뭇가지들과 무언가가 가라앉고 있다. 상가 계단은 아래로, 지하로, 어둠 속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한참을 내려, 가다, 보면 은행 문이 보인다. 낡은 문을 밀고 들어서면 급여이체를 위한 추가상품과 지로 공과금과 주택청약종합저축 안내문이 덜덜, 떨고 바람은 왜 그리 세게 부는지, 서늘한 감촉의 카드와 무인지급기와 도장과 보..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윤제림-지구인

지구인 …한때 같은 별에 살았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는 지금 어깨동무를 하고 바싹 붙어 앉아 있다, 처음 본 사이에! 다 어디로들 갔을까, 두 사람은 여기 있는데 윤제림 | 1987년 『문예중앙』 등단. 시집 『삼천리호자전거』 『황천반점』 『편지에는 그냥 잘 지낸다고 쓴다』 등. 시선집 『강가에서』. 동시집 『거북이는 오늘도 지각이다』. 동국문학상, 지훈문학상, 영랑시문학상 등 수상. 서울예술대학교 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 역임. 현재 경희대학교 국문과 교수.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박주택-다시 두 사람

다시 두 사람 -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꽃 피는 밤 남산 가까이 구름이 쉬어 가고 타워는 빛난다 핏기없는 여자 막바지에 다다라 잠수교를 걷는다 손이 닿기를 기다리는 알은 해쓱하다 귀신이 차기 시작하는 저녁 남자는 깨진 달 아래를 걷는다 깨진 달 별을 낳을 수 없는 밤 여자는 이태원 쪽으로 남자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목이 굳은 길을 걷는다 꽃 지는 밤 남자는 걷는다 별을 낳는 밤을 여자는 걷는다 손이 닿는 알 곁을 여자는 이사 간 집으로 들어가고 남자는 이사 온 집으로 들어간다 여자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남자는 죽는 게 죽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남자는 빌려준 존재처럼 개를 기르고 여자는 빌려온 존재처럼 고양이를 기른다 남자는 여자 속을 걸어 남자 속으로 여..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유자효-손자의 사유재산

손자의 사유재산 일곱 살배기 손자에게 사유재산이 생겼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준 세뱃돈이나 용돈을 상자에 담아 안방 벽장 안에 넣어두고 가끔 꺼내 본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봤더니 나중에 결혼하면 우리 집과 여자애 집 사이에 자기 집을 사기 위해서란다 용돈을 알뜰히 모으는 일곱 살배기 손자 오늘도 벽장을 열고 상자를 꺼내 제가 살 집값을 셈해보고 있다 유자효 | 1968년 신아일보(시), 불교신문(시조)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신라행』 시선집 『세한도』 시집해설서 『잠들지 못한 밤에 시를 읽었습니다』. 공초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신달자-어이! 달

어이! 달 어떻게 여길 알았니? 북촌에서 수서에서 함께 손잡고 걸었던 시절 지나고 소식 없이 여기 경기도 심곡동으로 숨었는데 어찌 알고 깊은 골 산그늘로 찾아오다니… 아무개 남자보다 네가 더 세심하구나 눈웃음 슬쩍 옆구리에 찔러 넣던 신사보다 네가 더 치밀하구나 늦은 밤 환한 얼굴로 이 인능산 발밑을 찾아오다니… 하긴 북촌골목길에서 우리 속을 털었지 누구에게도 닫았던 마음을 열었었지 내 등을 문지르며 달래던 벗이여 오늘은 잠시라도 하늘 터를 벗어나 내 식탁에서 아껴둔 와인 한 잔 나누게 가장 아끼던 안주를 아낌없이 내놓겠네 마음 꽃 한 다발로 빈 의자를 채워주길 바라네 어이! 달! 신달자 | 1972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봉헌문자』 『모순의 방』 『아버지의 빛』 등. 수필집 『그대에게 줄 말은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