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 35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이종섶-감정손해보험

감정손해보험 노후에 맞닥뜨리게 될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서, 노후가 아니더라도 어느 날 사고처럼 다가올 쓸쓸함을 견디기 위해서 감정손해보험회사와 계약을 맺고 한 달에 한 번씩, 또는 그 이상의 기회를 만들어 보험료를 지불한다 성실한 납부자, 그러나 가난한 납부자 돈이 많다면 감정보험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가진 게 없으니 실비 보상정도의 감정보험이라도 들어놔야 안심이 된다 혼자라는 것, 친구가 없다는 것 이대로 흘러가면 어느 순간 감정의 대형 사고에 직면하게 될지 몰라, 그 내상의 두려움을 아는 자로서 이대로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오늘의 외로움과 내일의 쓸쓸함이 그때마다 보험료를 인출할 것이다 감정보험에 일찍 가입해서 다행이다 오늘의 감정을 견디기가 쉬워졌다 이종섶 | 2008년 대전일보..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박경옥-달팽이를 읽다

달팽이를 읽다 가랑비 하루 종일 작은 초록 위로 흘러들고 발등을 적시는 저녁의 흙냄새가 소쿠리에 담기는 텃밭 가는 길은 파랗고요 개구리밥 논물에 그렁거려요 질척한 밭둑으로 비닐우산 속 하늘은 맨발로 첨벙이고 청개구리 한 마리 폴딱 아욱밭으로 뛰어 들어요 거기, 잎사귀 뒤에 숨어 있던 달팽이 놀란 가슴 천천히 더듬이로 어루만져요 가만가만, 저 천천히는 무얼까요 청개구리처럼 뛸 수도 없고 밤마다 찾아오는 그리움의 무게를 목청껏 뿜어낼 수 없는 슬픔의 기호일까요 빠르고 단단하고 높은 것들이 행과 행을 이루는 편견의 문장엔 쉼표도 없고 느낌표도 안보여요 얼마나 안간힘을 썼으면 연을 바꾸는 행간이 침묵으로 사뭇 축축할까요 행여 눈물도 상처도 더듬이로 달래는 저 둥근 고요가 몸이 몸을 껴안고 생을 끌고 가는 거라면..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양숙영-흔적

흔적 호탕하게 웃음이 헤프던 날도 하늘이 내려앉듯 절망이 밀려온 날도 망설임이 크던 마음 모두 다 털어버린 용기를 앞세워 굽은 숲길 따라 오르고 오르며 어느 양지녁 만날 때까지 오르기만 하자는 발걸음 어느 것 하나도 소용없다는 마음 하나 꽉 잡아매고 얼마쯤 따라 오르는 낯선 길 안개 피어 잘 보이지 않는 일주문 앞에 멈추어 버린 마음은 어디에 있는지 온데간데없고 그림자이듯 육신 떠난 옷자락만 그 흔적을 더듬어 찾고 있을 뿐 고요하다 양숙영 | 2007년 계간 『문파』 등단. 시집 『는개』. 제4회 배기정문학상 수상. 한국문협위원.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문파문협 이사. 고양문협 이사.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최정우-아침 바다

아침바다 안개에 포말이 부딪힌다 손가락 사이로 떨리던 넋이 바다로 떨어진다 배가 바다를 저어 걸어갈 때마다 어린 눈에 들려진 눈물 같은 바람이 바닷속을 헤엄쳐 간다 먹이가 되어 바다로 돌아간 이름 떨어지는 눈빛 속에 물고기 떼 멀어져 가고 가슴이 파도에 부서진다 아침이 보이는 바다에 두고 온 흔적처럼, 기억에 바다가 부딪힌다 최정우 | 2005년 『한국문인』 등단. 문파문인협회 사무국장. 문협80년사 편집위원.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천수호-빈방

빈방 사진이 걸린 방 눈동자에 빛이 새날 아침처럼 그득 담긴 그가 입은 정장은 상복에 가깝고 하려는 말이 전혀 없어 보이는 입술 그것이 사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쉽지도 않고 그가 방을 둘러볼 때마다 빈 곳은 사라진다 저 왔어요, 내 말이 너무 커서 빈 곳이 생기기 시작한 방 사라진 이불 밑에서 들리는 고른 숨소리 작은 쌀 봉지 옆에 두어 개 남은 팩 두유와 느슨해 보이는 휴 지 꾸러미 비누 몇 장과 치약 두어 통 산 자의 것이 널브러진 이 방 그를 한 번씩 흔들어 깨우던 울음소리도 집을 비워서 썩지 않는 것만 남아서 산 자를 증명하는 방 바닥은 차고 매끄럽고 생시라 부르기 어려운 것들을 불러내기 좋은 곳 떠난다는 말이 이렇게 꽉 찬 구멍들이라는 걸 한 장의 사진이 대신 말하고 있는 아직 문을 열지 ..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이현실-연뿌리

연뿌리 저것은 물밑에서 숨을 쉰 흔적 구멍으로 드나든 연못 한 채 하늘까지 다 받아 모시고 푸른 지붕 높이 올렸네 구멍으로 지은 집은 튼실한데 식솔들 끌고 거리에 내몰리던 家長은 캄캄한 물밑처럼 수심이 깊었네 뼛속 진액들 다 빼앗기고 허방다리 짚으며 허우적거릴 때 늘어가는 빚의 구멍들, 바람의 구멍들 파문은 멀리까지 흘러갔네 뼈를 세운 것들은 그늘도 넓어 저 뿌리 얼마나 깊은지, 구멍의 힘으로 연못이 번식하네 이현실 | 2003년 『예술세계』 『미래시학』 등단. 시집 『꽃지에 물들다』 『소리계단』. 제 5회 영농신문 주최 농촌문학상, 국가보훈처 보훈콘텐츠 입상(2019)외 다수. 현 계간 『미래시학』 편집주간.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송승환-깃발

깃발 파도 파도 파도 숲과 오름 너머 곶자왈 지나 저 푸르른 산간 돌개바람 속에서 흩날리지 않는 깃발 속으로 타오르면서 흐르는 불 물 고이면서 굳은 돌 바위와 모래 사이에서 물과 불을 지니고 나는 언제 폭발할 것인가 나는 언제 폭발할 것이다 저 창공을 향해 휘날릴 것이다 최초의 불과 연기를 품고 나는 하늘 아래 하나의 깃발 한라 송승환 | 2003년 『문학동네』 시 등단. 2005년 『현대문학』 평론 등단. 시집 『드라이아이스』 『클로로포름』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 등.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홍은택-어떤 오후가

어떤 오후가 붉고 투명한 비늘을 단 거대한 물고기 몸짓으로 헤엄쳐간다 정적 속으로 구릿빛 뒤웅박이 징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그들의 정수리를 딛고 익숙한 태양이 뚜벅뚜벅 걸어간다 낮잠을 갈아 내린 드립커피 한 모금 피카소의 시선으로 발뒤꿈치를 바라본다 잠결 따라 스트레칭 하듯 모란 꽃잎이 피고 꽃잎 따라 펼쳐지는 몇 갈래 인연들 점점 키가 작아지는 담벼락 끝 멀리 파블로프의 뒤통수가 소실점으로 사라진 뒤 잠깐 잠을 더 잘 수 있는 자유 그리고 침묵 노래하는 법을 잊은 어떤 오후가 홍은택 | 1999년 『시안』 등단. 시집 『통점에서 꽃이 핀다』 『노래하는 사막』. 공역시선 『영어로 읽는 한국의 좋은 시』.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김지헌-안개의 도시

안개의 도시 안개의 나라엔 소리들이 모여 산다 폭주족처럼 제멋대로 들이 닥치거나 보이지 않는 소리들이 텃밭을 갈고 밥을 먹고 자동차가 시동을 걸고 일터로 간다 때로 안개의 흡반에 빨대를 꽂고 소리들을 먹어치울 때가 있다 수심 깊이 소리들 가라앉아 수심(愁心)이 되는 안개의 도시에서 얼굴을 덮어버린 마스크 텅 빈 거리 봉쇄 된 입 한 때 야단법석의 오후를 가졌던 사람들도 하나 둘 안개의 도시로 몰려들었다 어느 날 불쑥 여기를 떠나 저기로 사라진 사람들 지리산 한 달살이 혹은 섬사람 되어보기 같은 것 안개처럼 뭉쳤다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들이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손짓한다 누구나 잠시 멈출 필요가 있다고 아직도 존재를 걸고 시를 쓰거나 몇 개의 약속을 늘어놓으며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 어서 빠져나오라고 긴 ..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정경해-엄마는 엄마잖아요

엄마는 엄마잖아요 -가방 속 아이* 내 꿈은요, 언젠가 본 그림 속 식탁에 어깨를 기댄 사과 몇 알처럼 함께, 그래요 ‘함께’는 한데 섞여 어우러지는 거래요. 사과처럼 불그스레한 얼굴로 아버지가 웃으면 엄마가 웃고 나는 풍선처럼 부푼 말들을 식탁 위에 마냥 쏟아내며 깔깔깔 웃음이 헤픈 아이로, 함께요. 가로 44㎝ 세로 60㎝ 폭 24㎝ 가방, 아니 캄캄한 구멍에 나를 구겨 넣고 엄마는 당신 꿈을 다지듯 가방 위를 잘근잘근 밟았어요. 틈새로 내 꿈이 자랄까 봐 쿵쿵 뛰고 또 뛰며 뜨거운 드라이기 바람을 불어넣어 가방 속에 당신 꿈을 녹이려 했지요. 궁금해요. 날 낳은 엄마는 저를 사랑했을까요. 내가 세상에 나오길 손꼽아 기다렸을까요. 나도 엄마 뱃속에서 발장난치고 하품도 하며 어리광을 부렸을까요. 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