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이란자-아침을 걷다 아침을 걷다 새들의 날갯짓이 햇살을 뿌리면 아침노을이 동터오고 밤새 내린 이슬이 풀잎과 풀잎에 송골송골하다 침묵보다 고요한 안개 뽀얀 입김 밀어 올리자 옥수수 대 쑤욱 한 눈금 올라선다 쏴아 쏴아 대지의 숨결 초록 잎새에 스며드는 소리 이슬 젖은 촉촉한 황톳길을 아침이 걷는다 나를 넘으며 넘어서며 이란자 | 2019년 계간 『문파』 등단. 공저 『열한 개의 페르소나』 『달빛, 그리고』 외 다수. 문파문학 운영이사. 호수문학회 회원. 시마당/2021년 가을호 2021.12.09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조윤진-사랑방캔디 사랑방캔디 두피가 저릿하도록 꽉 당신이 묶어 주었던 머리 네가 아이였을 때 그렇게 늙은 사람들만 보면 웃음을 터뜨렸다고 하도 왜요 물어서 그건 남의 나라 요라고 했다고 근데 할머니는 왜 했던 얘기만 해요? 우리 처음 만나는 사이처럼 당신이 따라 주었던 알로에 주스 방울끈의 고무줄이 늘어나고 끝내 그것을 잃어버리기까지 나는 너무 어려서 당신이 참 예뻤지 나는 늙고 싶지 않아서 당신의 말을 자꾸만 따라했지 조윤진 | 2018년 한국경제 신춘문예 등단. 시마당/2021년 가을호 2021.12.09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김영곤-우기 우기 오백 일이 지나도록 이 비는 멈추지 않는다 점점 사나워진다 무대 스케줄로 꽃피우던 나의 바깥, 그 막다른 골목 귀퉁이마저 삼켰다 칼날 세운 시선이 하얗고 네모난 지붕 안쪽까지 빗발쳤다 우산처럼 뒤집히고 진흙바닥에 나뒹구는 인간의 날씨에는 언제나 고독이 멈추지 않는다 점점 불안이 격렬해진다 쓸모없어진 본업을 접고 마지막 남은 상자를 열었다 보이지 않으나 사라지지 않는 우산 하나 우산을 펼친다는 것 멈추게 하겠다는 것 우산도 외로워서 사람의 온기를 꽉 쥐려는가 내 손을 놓지 않는다 누군가의 우산이 된다는 것 더 이상 접혀 있지 않겠다는 것 당신만은 젖지 않게 하겠다는 것 움켜쥔 손에서 온기가 마르지 않는다 김영곤 | 2018년 『포지션』 등단. 논문집 『최문자 시에 나타난 여성성 연구』. 산문집 『밤이.. 시마당/2021년 가을호 2021.12.09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주민현-방역 방역 플래시가 터진 필름 사진 속에서 우리는 옛날 사람 같다 별 기대 없이 나쁜 날씨를 산다 악몽을 향해 창을 연다 긴 벽에 난 작은 창은 위급상황에 깨고 나갈 수 없는 창이고 너른 풍경을 보여주지도 않는 등에 난 기억할 수 없는 점 같은 창 올봄 그 창은 메워졌고 우리가 너무 좋아했던 것은 우리가 외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입구에 두고 온 사람을 찾으려 미술관을 반대로 빠져나가고 있다 키치와 미니멀을 지나 리얼리즘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차가운 눈사람도 그림 속에서는 부드러운 털 짐승 같다 아직 전시가 시작되지 않은 미술관에 발자국 하나 유리문에 비친 광장의 시계탑에 비친 고급 부티크 상점의 종업원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곧 금지되었다 * 이 작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0년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선정 작.. 시마당/2021년 가을호 2021.12.09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이중환-고맙소 고맙소 먼 길 걸었다 외진 길 홀로 걷다가 오싹 소름 돋을 때 나 하나는 너무 외로웠다 서서히 스며든 바람(願)은 버릴 것이 아니었다 아교같이 접착력이 좋다는 밀퍼드 사운드의 푸른 홍합을 욕심낼 때처럼 결코 헛된 욕심은 아닌 것 같다 해는 어떤 무기를 써도 정복되지 않는 것 같이 되는 것은 되고 안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지만 캄캄한 길 위에 등불을 밝히듯 여명처럼 밝아오는 새벽빛 같은 것이 소중한 그대 여유로운 저녁 만찬을 소리 없이 함께해도 좋은 그런 날들을 같이 한다는 것 대보름달처럼 크고 환하게 다가온 당신 고맙소 이중환 | 2017년 계간 『문파』 등단. 시집 『기다리는』 공저 『그냥 또 그렇게』 『문파대표시선45』 등. 한국문인 협회, 문파문학회 이사, 시계문학 회원 시마당/2021년 가을호 2021.12.09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성영희-식은 꽃 식은 꽃 꽃들은 화려한 색깔로 뜨겁거나 차갑다 이미 뜨거운 계절에서 핀 적이 있는 조화는 식은 꽃이다 꽃피는 공장 조립되는 꽃들 씨앗이라고 말한다면 넓고 흰 천이다 그렇다면 화단수공업의 일꾼은 햇살 아닐까 꽃잎 한 장 한 장 붙여서 꽃을 피우는 동안 아무도 모르게 재료들을 가져오는 것이다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온다 목련 핀 자리에 장미 넝쿨이 지나가고 깡마른 나뭇가지, 무더기무더기 흰 꽃들이 지나간다 조화의 개화 시기는 계절이 없다 불 앞에서는 금방 화르르 지고 마는 식은 꽃들 조화에게는 불이 겨울일 것이다 꽃피는 공장 여공들은 저녁에 만개한다 시들지 않는 조화처럼 저마다의 꽃송이를 안고 퇴근하는 여공들 뚝뚝 떨어지던 졸음도 창문 넘어 집으로 간다. 여공 몇 명만 데려다 놓으면 사계.. 시마당/2021년 가을호 2021.12.09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석민재-신경 신경(神經) 감나무에서 떨어진 것은 갈비뼈 다섯 대가 부러져 병원 침상에서 고양이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잠시잠깐 저승 쪽으로 돌아눕다가 불에 덴 듯이 깜짝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는 것은 저 가마솥 때문이다 장작불에 달아오른 신음소리 때문이다 비명보다 빠르게 도망간 고양이 때문이다 쇄액- 쇄액- 저 날카로운 고양이 푹 고아질 고양이 가마솥을 할퀴는 고양이 관절이 아픈 고양이 시칠리아의 암소 시칠리아의 암소 시칠리아의 고양이 오늘도 뒤뜰에는 솥뚜껑에 큰 돌이 얹힌 채 푹 삶기고 있는 것은 석민재 | 2015년 『시와 사상』 등단. 201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엄마는 나를 또 낳았다 시마당/2021년 가을호 2021.12.09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김호성-돌아오는 사람 돌아오는 사람 비린 그늘을 헤집는다 몇 년 후의 날씨를 셈하는 기분으로 희미한 이웃들이 곧 가루로 변하듯이 긴 송곳니를 가진 남자가 강가에 서 있으면 숲은 텅 빈 상자처럼 버려진다 수면 위에서는 땀을 떨어뜨리고 물속에서는 뼈와 살을 찾는다 두 발이 떠오를 때 생기는 진동은 무당을 닮았다 스며들어서 너무 얕은 마음처럼 뒤꿈치로 물러나는 여행 창틈 사이로 몰래 흘러내리는 키득거림을 기록하기 위해 수건에 입술을 문지른다 고목과 고목 사이 떠다니는 혀가 사라지기 전에 손바닥 속의 거미는 자신이 쳐놓은 손금을 갉아 먹고 있다 김호성 | 2015년 『현대시』 등단. 시마당/2021년 가을호 2021.12.09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김무웅-불순한 철문 불순한 철문 검고 무거운 것은 속이 뻔하고 처음 보는 것은 언제나 낯설지만 이 철문이 유독 그랬다 언젠가 맞닥뜨리리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날이 너무 빨리 왔다 문은 뒤에 화기를 감추고 서서 고객을 만났다는 듯이 내게 여유를 부렸다 도대체 이 문은 어느 편인가 소속이 선명하지 못했다 이편에 서 있으면서도 저편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일행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 친구는 누어서 들어갔고 문틈 사이로 불길이 잠깐 너울거리다가 철문이 철석 내려 닫혔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떨구고 울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관을 삼켜버렸다 다시는 볼 수 없다 이승과 저승 사이를 철문이 가로막고 선 것이다 김무웅 | 2015년 『문학시대』 등단. 시집 『맥박』. 미래시학작가회 회장. 2021 ARKO문학나눔선정도서. 시마당/2021년 가을호 2021.12.09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채길우-우유급식 우유 급식 우리는 흰 우유가 지겨워 마시면 배가 아파오는 듯해도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면 피할 수 없었던 그것 일주일에 하루 나오는 초코 혹은 달에 규칙 없이 두어 번 받아먹는 바나나나 딸기를 손꼽아 기다렸지만 선생님들은 그때에도 흰 것만 마셨고 어른이 되면 어째서 하얀 빛깔을 더 좋아하게 되는지 물어보지 못한 채 부루퉁하고 미적지근한 태도와 더부룩한 뱃속에도 아랑곳없이 칠흑색 눈동자에 허연 분필 가루를 뒤집어쓴 어쩐지 너무 쉽게 지워져 버릴 것만 같은 잘못된 얼굴로도 우리는 역사를 외우거나 공식을 풀면서 쑥쑥 자라 누런 인종이 되어 갔다. 채길우 | 2013년 『실천문학』 등단. 시집 『매듭법』. 시마당/2021년 가을호 2021.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