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당/2020년 겨울호 31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김미정 - 블라인드

블라인드 벌어진 햇살 사이로 손가락을 넣는다 눈 감고 뛰어내리는 창문의 비명들 차례로 쌓인 계단의 신호음이 사라진 시간을 깨운다 몸을 옆으로 돌리면 더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여러 번 익숙한 자세로 너와 나 사이 빗금을 그으며 허공을 당긴다 종이를 만지다 손이 베어진 느낌으로 침묵을 가늘게 채 썰어 그늘에 넣고 감아올리는 행위는 내일의 반복이다 말없이 빠져나간 나를 훔쳐본다 떨리는 눈꺼풀은 불안을 날리고 안에서 밖을 보며 생을 중얼거린다 옷을 벗고 태양을 내린다 물컹한 바람의 고백이 구겨진다 김미정 | 2002년 『현대시』 등단. 시집 『물고기 신발』 등.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문숙 - 힘줄

힘줄 아프게 치켜든 팔이 힘없이 툭 떨어진다 “어깨 힘줄이 끊어져 염증이 심합니다” 그동안 내 팔을 자유롭게 했던 것이 힘줄임을 몰랐다 밤마다 통증으로 알약을 삼켜야만 잠이 든다 엄마 떠난 그때도 그랬다 힘없고 아파서 긴 시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내 영혼의 힘줄이었다 의사는 주변 근육을 키워서 힘줄처럼 써야 한다며 운동법을 알려준다 “살살 달래가며 해야 합니다 때로는 악하고 비명소리가 날만큼 아파도 포기하면 안됩니다” 몸도 마음도 끊어진 힘줄들 때문에 살맛을 잃었다 주변인 같은 당신이라도 살살 달래가며 내 힘줄이 되는 그날까지 문숙 | 2000년 『자유문학』 등단. 시집 『단추』 『기울어짐에 대하여』.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김종태 - 히라노 신사의 벚꽃

히라노 신사의 벚꽃 축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가 유치원생처럼 작아진 노파를 휠체어에 얹은 가족이 줄지어 종종걸음 신사로 들어오고 약수터 흐르는 물소리가 잦아들 무렵 얼마 안 남은 생의 안쪽을 들여다보듯이 백발 노파는 포옥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이제 이승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의 끈을 날줄 삼아 그 위로 벚꽃의 시간을 씨줄로 엮는 마음들 꽃잎의 분홍 그림자가 거무죽죽 저승꽃을 물들이듯이 연분홍 솜사탕을 든 소년이 죽순 구이 입에 문 소녀를 바라보듯이 여기저기 스쳐 지나가는 삶의 향연들 시간의 행렬들 오늘밤 저 꽃들 중에 절정의 음역에 닿는 것 또한 있을 것이다 아무리 깊어진 봄이더라도 꽃이 진 자리에 다시 새로운 꽃잎들이 피어나진 않을 것이다 벚꽃 진 옆 자리, 그 옆옆 자리서 살살 흔들리는 ..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이경 - 커다란 새장

커다란 새장 커다란 새장을 들고 날아야 하는 새가 있다 억조창생을 먹여 살리는 새 닭은 왜 날개가 있는데 날지 못 합니까 새벽마다 높은 가지에 올라 하늘에 고하는 소리 맨드라미꽃보다 붉은 상소문 새벽이 풀어 내리는 흰 두루마리 위에 선혈 뚝 뚝 저걸 시라고 해야 하나 푸른 색 천장을 가진 커다란 새장 이경 | 1993년 『시와시학』 등단. 시집 『소와 뻐꾹새소리와 엄지발가락』 『푸른 독』 『오늘이라는 시간의 꽃 한 송이』등. 유심작품상, 시와시학상 작품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김태형 - 창라

창라 가다가도 굽이를 치기 마련이듯 길은 뻗어 올라왔다 길 아닌 곳조차도 누군가 지나왔다 소금가마니를 실었을까 잘 빻은 보릿가루를 짊어졌을까 눈이 크고 순한 짐승의 잔등에 짐을 싣고 설산을 넘어오던 오래된 길이 어딘가에 또 숨겨져 있었다 은가락지를 하나 만들기 위해 말린 살구 포대를 들고 깊은 마을의 대장간을 찾아 들어갔으리라 그 길에 살구꽃이 한창 흩날렸으리라 구불구불 했으리라 사람이 지나가는 길이었다 높은 하늘을 붙들고서야 내려갈 수 있는 길이었다 안개가 내려서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김태형|1992년 『현대시세계』 등단. 시집 『로큰롤 헤븐』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코끼리 주파수』 등. 산문집 『초능력 소년』 등. 제4회 시와사상문학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김왕노 - 불의 낫

불의 낫 아버지께서 새벽 모서리에 자리 잡고서 녹슬고 무디어진 낫을 가신다. 잠깐 비워두면 잡풀이 돋아나는 할아버지 산소를 벌초하러 그간 뒤란에 팽개쳐둔 낫을 찾아 젊었을 때 논두렁 밭두렁 풀을 깎고 소꼴을 하러 낫을 갈듯 죽은 날을 새파랗게 살리신다. 휘두르면 어둠이 절단 날 낫 불의 낫 한 자루를 준비하신다. 잠깐만 팽개쳐두면 녹이 슬고 무디어진 아버지의 일상도 눈치코치도 없고 감각이 없는 내 촉의 각도 새파랗게 세워주며 아버지 팽개쳐둔 낫을 가신다. 언젠가 낫을 갈며 이 낫으로 동학처럼 미친놈에게 확 들이대는 날이 와야 이 땅의 사람과 내가 잘 사는 날이 올 거라 하셨던 아버지가 다시 낫을 가신다. 무디어진 세월에 새파란 날을 아버지가 새벽부터 세우신다. 김왕노| 192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공광규 - 저녁 무렵 강변

저녁 무렵 강변 청미천이 버드나무와 갈대를 데리고 와 남한강을 만나는 옛날 나루가 있었다는 도리마을 앞 강둑 습지에는 뗏목 꾼을 따라와 무리를 이루고 사는 단양쑥부쟁이 밭이 은하수 내려온 듯 부옇고 강 언덕에는 별무더기가 금계국으로 환하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 시절에도 마당에 모여 풍물 치며 행진하는 나루굿을 하고 수박과 돼지머리와 마른 북어를 놓고 절을 한다 서울 생활을 접고 내려와 머리카락이 겨울 산처럼 희고 깨끗한 의리가 히말라야만큼 높은 시인이 마을사람들과 잘 어울려 사는 동네 농장에서는 저녁닭이 울고 개 짖는 소리가 닭울음소리에 화답하듯 정겹다 개망초와 쑥부쟁이와 금계국과 나리꽃이 환한 청미천이 남한강을 만나는 곳에서 옛 도리나루터까지 강물 따라 걸어가는 붉은토끼풀 꽃이 핀 저녁 무렵 강변 공광규..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박남준 - 보드카를 마실 시간

보드카를 마실 시간 달리는 영혼이었나 중앙아시아의 창밖 흔들리며 다가오는 황무지는 추 추¹ ~ 말 잔등을 채찍하는 유목의 길이다 해질녘 소꼴을 먹이는 아이와 흙먼지 날리는 길가에서 환한 손 흔들어주는 순한 얼굴들 오래지 않은 어제가 돌아가야 할 내일이 아니냐고 묻는다 기억들은 미루나무가 많은 옛 마을을 더듬는다 저 나무들 사이 흙먼지 자욱한 낡은 버스가 달리기도 했지 그 버스 꽁무니가 흘리는 낯선 냄새를 좇아 코를 벌름거리기도 했는데 코딱지만 한 가게를 할까 작은 그리하여 정겨운 발걸음이 걸어 나올 것 같은 점방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만두를 빚던 손을 옷자락에 훔치며 옛날처럼 일어나실까 추억과 시간과 나는 붕붕 봉고차를 몰고 하늘이 맞닿는 산골을 돌며 꿀벌을 칠 것이다 벌들이 돌아오는 ..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한영옥 - 여러번이 또 여러번

여러번이 또 여러번 비가 온다 나무는 얼마간 제 둘레를 한껏 가려준다 품 안으로 사람들이 뛰어 든다 비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더는 가려주기가 어려웠다 에잇, 사람들은 떠나버린다 미안하다거나 서운하다거나 감정은 언제부턴가 사라졌다 참으로 여러번 일어났던 일은 또 일어날 일이었을 뿐 여러번이 또 여러번 지나가고 떠나갔던 사람들 어찌어찌 와서 어이쿠, 천년이나 된 나무네 놀란 표정으로 한 바퀴 돈다 또 일어날 일이었다 여러번의 여러번 천년의 천년 동안. 한영옥 |1973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아늑한 얼굴 』 『다시 하얗게』 『슬픔이 오시겠다는 전갈』 등. 한국시인협회상, 전봉건 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