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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2020년 봄호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기획특집] 전소영-발치에서 출렁이는 미래

발치에서 출렁이는 미래
- 포스트휴머니즘의 인간학

 

 

 

업그레이드(upgrade)된 자는 누구인가

선택지가 없었다. 없었다고 여기는 편이 종내 그에게는 나았을 것이다. 별안간 정체 모를 괴한의 습격을 받아 아내를 잃고 자신의 육체마저 출구 없는 마비에 감금당했을 때, 그는 최첨단 두뇌인 AI ‘스템’을 소형 칩으로 이식받았다. 목적은 당연히 복수. 스템은 그의 뇌리를 나눠 쓰며 상상 너머의 위력을 몸으로부터 이끌어내기 시작했다. 그 덕에 그는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악인들(이라고 믿었던 자들)을 처단할 수 있었다. 신체적 결핍의 보완 차원을 넘어 인간으로 하여금, 정말이지 끝없는 잠재력을 발휘하게 하는 스템의 권능은 처음엔 놀라움으로, 후엔 두려움으로 보는 이를 황망하게 한다.  
그러다 두려움이 확고해지는 순간, 다소 예상 가능한 결말. 진실은 이러했다. 비범한 두뇌를 가진 인간이 만든 더 비범한 AI 스템은 인간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그런 스템의 레이더에, 누구나 자율주행 차를 타고 육체에 기계를 내장할 수 있는 시대에도 홀로 레트로 카를 고집하는 그가―정확히는 기계와 온전히 무관한 그의 몸이 포착되었다. 사고도, 복수도, 신체의 조종권이 점점 더 스템에게 양도된 것도 다 시나리오 대로였다. 영화 <업그레이드Upgrade> (2018)의 이야기이다. 
모든 것을 알아차린 인간의 반격이 시작되었다!면 좋았겠지만 결국 주인공 그레이는 AI가 의식 아래 두껍게 깔아놓은 행복한 환상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아 버린다. 기어이 육신의 주인 자리를 강탈한 스템은 이제 자기 것이 된 피의 촉감을 전리품 삼아 승리를 자축한다. 이쯤 되니 이 영화가 세련된 키워드들을 놔두고 업그레이드라는 제목을 단 이유를 알 것 같다. 이것은 AI의 힘을 빌려 업그레이드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몸을 빼앗아 업그레이드한 AI의 이야기이다. 아이러니컬한 ‘업그레이드’인 셈.
이 영화의 서사는 다분히 전형적이나 때론 전형적인 것이 가장 리얼리즘적인 것이기도 하다. 클리셰 내지 거듭되는 언급들은 그것이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정황과, 반복되어도 주시하려는 이들의 마음을 출처 삼는 까닭이다. 영화는 인공지능의 미래에 관한 익숙한 기대와 공포를 최대한으로 부풀려두었다. 육체의 유한성을 극복하게 해줄 첨단 기술에 대한 끝없는 욕망, 하지만 그것이 언제고 인간을 집어삼킬지 모른다는 공포. 
1956년 존 맥카시(John McCarthy)가 ‘사고하는 기계에 관한 연구회’에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후부터 허만하, 「인공지능과 시」, 『시와 세계』, 2019.9, 19면.
 ‘인간을 파멸시키고 싶다’는 농담(?)을 남긴 로봇 소피아와 알파고(AlphaGo)가 충격파를 일으킨 근래에까지, AI에 대한 인간의 판단은 이 같은 욕망과 공포, 그로부터 비어져 나온 반성적 성찰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자운동 해왔다. 


포스트/휴먼/이즘 
 
그 진자운동에 관한 상상력을 가장 적극적으로 펼쳐놓은 매체 중 하나가 영화일 것이다. AI에게 비중 있는 배역을 맡긴 텍스트들을 범박하게나마 일별해보면, 그 안에서 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포스트휴먼-이즘(posthuman-ism)적인 접근법과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적인 접근법이 병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양쪽 모두 실은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이라는 개념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담론이다. 다만 포스트휴먼-이즘이 말 그대로 인간 이후에 오는 존재, 인간을 능가할 무언가라든지 개조되고 향상된 인간에 대한 사유를 지칭한다면 이 같은 존재나 존재 방식을 지칭하는 개념어는 엄밀히 말하면 ‘트랜스 휴머니즘’이다. 트랜스 휴머니즘이란 “기술을 활용하여 몸과 마음을 향상시킬 수 있고 그래야 하며, 우리가 기계와 융합되어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더 이상적인 모습으로 개조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믿는” 담론이다. (마크 오코넬, 『트랜스 휴머니즘』, 노승영 역, 문학동네, 2019, 15면.) 이 글의 목적이 용어의 규정에 있는 것은 아니므로 이에 관한 상술은 다음으로 미루어 둔다.
,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 우월주의의 세계관을 파기하고 탈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의 조건을 묻는 방식을 뜻한다. 
 AI 영화 사실 AI 영화의 규정은 좀 더 구체적이고 신중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이라는 용어가, 그 정의부터 아직 분명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에 매우 다양한 국면에서 조금씩 결이 다른 말로 쓰이기 때문이다. (고선규, 『인공지능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타커스, 2019, 26-27면.) 이 글에서는 편의상, 인공지능의 범주에 포함되는 존재가 서사에 중요하게 등장하여 포스트휴먼-이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의 양상을 드러내는 영화만을 언급하였다.
의 골동품 격인 <메트로폴리스Metropolis>(1927)의 한 장면으로 들어가 보자. 복제 인간 마리아가 인간 집단의 대립 해소를 위해 위풍당당하게 투입된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주어진 임무를 가볍게 무시하고 갈등의 화력을 키운다. 잘 알려진 <터미네이터The Terminator>(1984)나 <스크리머스Screamers>(1995)의 문법도 유사하다. 인간의 테두리 없는 탐욕이 더 탐욕스러운 인공지능을 탄생시킨 정황들. 포스트휴먼에 대한 거친 욕망의 종착지가 비극과 공포일 수 있음을 묵시하는 서사들이다.
그런데 근자에 이르러 주연 자리에 올라선 AI들은 좀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그녀Her>(2013), <엑스마키나Ex Machina>(2015), <나의 마더I am mother>(2018) 등이 내세운 ‘인간이 되고자 하는 비인간’이다.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인공지능, 깊은 유대를 바라는 인조인간 등 그 양상은 다양하지만 공통적으로 ‘인간의’ 쓸모를 위해 만들어졌고 ‘인간이’ 무쓸모하다 여겨 폐기될 위기에 놓인다. 이들 중 몇몇은 심지어 인간보다 더 윤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인류에 항의하거나 반격하며 이런 질문을 울컥 게워놓는다. ‘내가 그 좋다는 인간이 되어보겠다는데 대체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물음은 ‘인간(적인 것)’이라는 말의 테두리를 우악스럽게 흔들면서 그것의 성패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다빈치로부터 저 유명한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인체비례도)이 만들어졌을 때 인간의 몰락은 예정되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표본’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동조한 주체들이 내놓은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인간의 정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상’, ‘상식’이라는 말은 폭력을 담보한다. 그것은 때에 따라 ‘정상 집단’이, 그들이 간주한 ‘비정상 집단’을 억압하는 근거로 쓰인다. 이를테면 인간의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근대 안에서 ‘인간’ 혹은 ‘인간중심주의(humanism)’가 배태되었을 때, 그것은 인류만을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그 외의 존재들, 비인간들은 인간 이하로 전락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인간의 편의와 향락을 위해 만들어졌다가 역시 인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폐기되는 인공지능도 물론 그중 하나이다. 하다못해 인간 내부에서도 ‘상식’과 ‘보편’이 권력을 가진 인종과 젠더, 종교가 그 타자들을 억압하는 근거로 쓰였다는 진실을 참담한 역사가 증명해오지 않았는가.

아우슈비츠엔 정신병과 감기가 없었다. * 프레모 레비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은유가 무섭다.
정신병원이나 감기가 없는 곳이 다 아우슈비츠 같기 때문이다.

뭔가 없어져야 해서 결국 없애버린 곳은 다 강제수용소 같다.
한 덩어리의 빵을 위해 누군가를 벼랑으로 밀어버릴 수 있다면
부모가 제 자식을 때려 죽여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겠지만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고 자칫
무슨 일이든 다 하면 그건 안 한 것만 못한 것인데

(…) 

살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하고
우리는 여전히 아우슈비츠에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쪽에 인간은 있다.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최소한 인간이 필요하다. 

- 이현승, 「호모 사케르」(『창작과 비평』, 2019년 여름.) 중에서

강제수용소는 “뭔가 없어져야 해서 결국 없애버린 곳”이다. 없어진 대상은 ‘정상적’이지 않은 누군가, 이를테면 정신병을 앓는 ‘비정상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정신병의 기준은 모호하다. 이때의 정상/비정상은 누가, 어떻게 구획하는가. 구획하는 권력을 지닌 자가 제게만 이롭게 기준을 정한 것이다. 그 기준에 따라 누군가는 정상으로 대접받고 누군가는 비정상으로 취급된다. 후자에 붙여진 이름이 이 바로 ‘호모 사케르’이다. 권력의 강대함을 과시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또 권력의 유지를 위해 배제되는 생명이다.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최소한 이것을 알아야 한다.  
근대적 ‘인간성/휴머니티(humanity)’라는 말에는 인간이 인간 내, 외부의 타자들과 위계를 형성해나가는 음험한 과정이 아른거린다. 하지만 그 결과는? 홀로코스트와 전쟁, 황폐해지는 자연의 반격으로 인간은 파산의 위기에 처했다. 위기를 틈타 비인간-AI가 묻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이 세계에서 가치 있는 존재라면, 그런 인간의 조건이란 대체 무엇인가.’  


다시, 인간학

본격적인 인공지능 시대를 예비하는 문학 역시 그 물음의 배턴을 이어받을 필요가 있다. 읽는 이들에게 왜, 어째서, 인간인지, 아닌지를 물어볼 수 있는 문학. 좀 더 나은 인간의 정의를 같이 만들자고 권유하는 시도. 여기에 탈휴머니즘적 인간학 혹은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의 기획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용어는 임석원,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의 기획: 배타적인 인간중심주의의 극복」( 『인간과 포스트휴머니즘』,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3.)에서 빌려왔음을 밝혀둔다.
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을 것이다. 
여기 하나의 소설이 있다. 윤이형, 「굿바이」, 『러브레플리카』, 문학동네, 2016. 
 먼 미래를 한 인간 여성이 살아내는 중이다.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하는 시스템은 그때까지도 지나치게 건재하여, 가난하고 고단한 그는 여전히 김밥으로 겨우 입치레한다. 그의 직업은 스파이디를 설득해 인간의 몸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명 리턴 시술을 받게 하는 것. 대출이 불가피할 정로도 터무니없이 비싼 시술이니만큼 그것을 종용하는 역할이 비루하지 않을리 없다. 하지만 그는 더 허름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데 뱃속의 아이 때문이다.
그러면 스파이디는 누구인가. 미래 인간 중 일부는 여전히 불공평한 사회 구조에 불만을 품고 화성에 평등한 공동체를 구성하고자 했다. 구성 조건은 모두가 기계 몸에 정신을 심는 것, 다시 말해 다른 생명을 착취하지 않고서는 유지하기 힘든 육체를 얼음에 보관하는 것. 그렇게 만들어진 포스트휴먼이 스파이디이다. 그들은 태양열 외에 필요한 것이 없고 저마다의 뇌를 네트워크로 연결해 생각과 감정을 주고받는다. 그 스파이디를 인간으로 리턴시키는 일이 녹록지 않을 것도 같지만 돌연 죽음을 택하는 스파이디가 생겨나고 생존자도 하나 둘, 지구로 귀환 중인 상황이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인간 여성은 어린 날 친구였지만 지금은 과거를 다 잊어버린 스파이디를 만난다. 그래서인지 리턴의 설득에도 실패하고 그의 인간 몸을 태워주기까지 한다. 돌아갈 몸을 버린 스파이디는 홀로 출산을 하는 인간 여성을 위해 병원에 동행, 탯줄을 잘라준다. 단, 이야기의 진짜 초점 인물은 이 둘이 아니라 마지막에 태어나는 아기이다. 작중 ‘나’이기도 한 아기는 복중에서 인간 엄마와 스파이디의 현실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둘 다 원치 않는 태아는 출생을 포기하려고까지 한다. 하지만 그 출산이 시작되고 기억은 모두 지워진다. 
 아기는 갈림길 위에 설 것이다. 육체와 함께 목소리 듣는 기쁨, 포옹의 촉감도 버리면 스파이디가 될 수 있다. 물론 네트워크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보 차원의 교류일 뿐 온기 어린 교감이 아니다. 반대로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 남는다면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고통스러운 삶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둘 다 여의치 않은 슬픈 디스토피아. 하지만 이것은 예상 가능한 내일의 모습이기도 하다.    
문명이 풍요로워진다고 해서 그 혜택이 모두에게 수평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종종 기술의 가파른 발달은 계층 간의 간극을 심화사키기도 했다. 인간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비약적인 발전의 수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수를 웃도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렇다면 인간의 불행도, 스파이디의 불행도 넘어서기 위해 공존을 위한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윤리적 진보를 위한 담론과 제도가 기술에 딱 한 걸음씩만 앞서 구비되어 도래할 시대의 이로움이 인간 및 외부의 존재들에게 두루 전파될 수 있도록. 문학/문화는 적어도 그 대비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비상경보기가 얼마든지 될 수 있다.    

2016년 알파고는, 인간의 전유물이라고 생각되었던 직관과 추론의 영역을 그가 능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동봉해 송신했다. 더불어 예술계는 인공지능이 창작의 영역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놀라운 알림을 받았고, 다른 분야라면 몰라도 예술만은 AI에 침범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을 구겨버려야 했다.   
그해 AI가 쓴 소설, 그것도 AI를 일인칭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문학상의 예심을 통과했다.  AI가 작성한 대본을 바탕으로 단편 영화도 나왔다. 이듬해에는 AI의 시집까지 출간되었다. ‘인공지능 단독 창작이라기엔 인간의 손을 지나치게 많이 빌렸다’는 비판이 일었지만 그것을 위안 삼기에는, AI가 작중에 남긴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날. 컴퓨터는, 스스로의 즐거움 추구를 우선하며, 인간에 봉사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조재룡, 「시(), 그리고 인공지능」,(《모든:시》, 2017.9.)의 50면에서 재인용. 인공지능이 생산한 텍스트에 관한 면밀한 논의가 이 글에 담겨있다. 
란 구절이 꽤 서슬 퍼렇게 느껴진다. 이 일련의 소식들은 AI 시대에 대한 근심 어린 관심을 현재의 살갗에 점점 더 밀착시키고 있다.    
다만 미래의 향방을 우려하는 영화나 소설, 사건들이 인간에게 ‘AI의 개발을 중단해야 한다’거나 ‘AI와 대결할만한 새로운 능력을 찾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아니다. 변화의 속도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인공지능이 일상이 되는 시대가 발치까지 밀려왔고 인간은 가장 유의미한 대응 방식을 탐문해 나가야 할 것이다. 비상경보기를 켜고, 누구보다 나 자신의 인간다움에 대해 가장 날카롭게 질문하면서. 


전소영
2011년 겨울 『문학사상』.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현대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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