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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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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정수경 - 말의 불균형 말의 불균형 마는 모두 땅속에서 자라는 줄 알았다 공중에 달린 마를 처음 먹었을 때만 해도 말馬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열매마는 공중에 매달려 있는 마를 말하고 말발굽을 닮았다 말은 자신의 몸 일부를 넝쿨에 묶어 두고 골목 어느 곳을 달리고 있을까 새가 달리고 음악이 달리고 의미 없는 모자도 매달린다 마는 뿌리를 버리고 왜 허공으로 이주했을까 지하로 주소를 옮긴 새도 있지만 말이 남기고 간 말발굽을 따라가면 찾고자 하는 걸 찾을 수 있다 흰 개와 검은 개가 오는 것도 그랬다 새장 속에 화분을 넣으면 새는 균형을 되찾지만 말의 불균형은 세계 곳곳에 남아있다 아이언 피시(Iron Fish)는 말이 남긴 말발굽의 다른 형태, 물고기는 흐물거리는 몸을 가졌지만 동물성보다 식물성에 가깝다 캄보디아 골목에선 한 마리의..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최연하 - 어떤 반란 어떤 반란 세월에 방치되었던 묵은 돌기들의 반란 비바람을 가득 물고 있는 교각 사이사이로 강의 울음이 가름할 수 없는 소용돌이가 되네 아픈 기계음이 잠든 세포들을 불러세우고 고통의 분화구를 만드네 상아처럼 빛났던 한 시절의 꿈은 괘도를 탈선하고 막, 벙글 어진 목련에 마음만 비비듯 내 안의 또 다른 텅 빈 통로 하나 허망한 쉼표로 있네 최연하 | 2016년 『월간문학』 등단. 시림문학회 회원. 『미네르바』 이사.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정정임 - 그녀의 결혼식 그녀의 결혼식 속이 꽉 찬 그녀가 설레는 마음으로 염전의 사내를 만났다 노오란 속살에 서서히 바다가 스며들자 하늘 높이 세우던 그녀의 콧대가 숨을 죽인다 파 마늘 양파 빨간 고춧가루 합체한 사랑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봄볕 오지항아리 속에서 묵을수록 깊어지는 완전한 발효 신혼의 단꿈이 익어간다 맵고 쓰고 단 세상을 짊어질 한 생의 역사가 숨을 쉬기 시작했다 정정임 | 2015년 계간 『문파』 등단. 동남문학회 회장. 동남문학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장선희 - 공황 공황 일순간, 길가에 떨어진 핸드백 속 흐트러진 물건들 온갖 가시들이 왼쪽 심장을 헤집고 들어와 아우성치며 숨통을 조여 맨다 봄날의 벚꽃나무 떨어져 나간 꽃잎처럼 점점 혼미해지는 표류의 길에 오른다 별을 응시하다 세상으로부터 밀려나는 배 한 척 뒤척인다 아뜩한 무의식 속, 암흑의 세상에 갇힌 나를 깨우는 차가운 시선들 망각에 찢겨져 나간 순간과 기억들 찢긴 페이지 한 부분 더듬더듬 꺼내고 있다 장선희 | 2015년 계간 『문파』 등단.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문영하 - 금목서 그늘에서 백일몽을 꾸다 금목서 그늘에서 백일몽을 꾸다 나무 한 그루 빈 집을 지킨다 햇살 한 겹 내려와 앉았다 가고 저녁이 하품하며 몸을 뉘었다 간다 전혀 닿을 수 없는 당신 나무속에 살아 뿌리와 줄기 쉼 없이 오르내리며 꽃을 실어 나르는 것일까 향기는 기억 속에 끼워 둔 갈피 같아서 아련한 기억들이 백일몽으로 일어선다 시월 한낮, 뒤란이 수런거린다 나무가 제 겨드랑이에 송송 황금알을 붙이고 있다 떠날 길이 급한 벌 나비, 등황색 꽃의 몸을 바쁘게 드나들고 향기는 담을 넘어 하늘로 길을 낸다 향이 만 리를 간다며 당신은 이 나무를 심었다 향기는 북천에 가 닿고 시간의 바깥에 서 계신 당신이 말갛게 웃는다 *물푸레나뭇과에 속하는 상록수, 꽃은 향수 샤넬 N5의 주원료. 문영하|2015년『월간문학』등단. 시집『청동거울』.『미네르바..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이설빈 - 의자를 위한 네 번의 변주 의자를 위한 네 번의 변주 이 시는 한 그루의 향나무로 만든 공용책상 위에서 쓰였고, 한 그루 죽은 향나무로 만든 공용책상 위에 놓일 것이다 ──한밤에 불을 켜고 너는 홀로 의자에 앉아 이 시를 쓰고 있다. 이 시는 죽은 향나무로 만든 한 개의 공용책상 위에 놓여 있었고, 한 개의 공용책상으로 만들어져 죽은 나무의 향을 두르고 앉아 있을 것이다 ──이 밤에 불을 켜고 너는 홀로 한 의자에 앉아 시를 쓰고 있다. 이 시는 책상에 앉는 공용자세를 만들어 하나의 죽음에 나무 향을 둘렀고, 한 그루 나무의 향이 아우르는 공용죽음의 자세로 책상에 앉을 것이다 ──이 시의 밤에 불을 켜고 앉아 너는 홀로 한 의자를 쓰고 있다. 이 시는 나무 한 그루로 펼쳐진 죽음의 향을 환기하며 책상에 앉아 있었고, 책상에 앉은 ..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이정훈 - 고래는 한마디 하려 했을 뿐인데 고래는 한마디 하려 했을 뿐인데 왜 이 집엔 저녁마다 배가 들어오는가 럼주라도 한잔 하면서 마른 정어리 꼬리를 씹어가면서 통 구르는 소리 쇠사슬 끄는 소리 수면을 가로지르는 뱃머리에 대하여 작살수들은 말하리 선창의 오크통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 항해사들은 말하리 우리도 밤마다 천정을 울리는 외다리 고래 뼈의 유령에게 시달린다네 돛대에 못박힌 금화 한 닢은 굴러가지 못하고 모든 오해와 파국의 뻔뻔한 엔딩 하품 끝에 흘러내린 눈물 속으로 작살은 날아간다 붕대와 피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세이렌이 달려오고 크라켄의 촉수가 벽면을 휘감을 때 보라, 오늘도 수면 아래 몸을 세워 잠드는 3단지 향고래 떼 관을 타고 떠돌아야 하는 우리를 형편없는 배당을 쥐어 주며 바다로 내몬 업주는 어디에 있는 이정훈 |2013년 한..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시마당] 김재현 - 어혈 어혈(瘀血) 여인의 무릎에 의원은 침을 놓는다 이곳이 아프시지요, 묻는다 병은, 바늘에 걸려들지 않는 영리한 물고기들 수면을 흔들며 튕겨 오르는 빈 찌처럼 침이 빠진 자리, 피는 겁먹은 아이의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다 어혈(瘀血)이 풀린 겝니다, 의원이 늙은 사내에게 말한다 여인을 업고 돌아와 사내는 그녀의 팔을 주물러준다 사내는, 좁은 단칸방에 앉은뱅이 상을 펼쳐 삭은 김치를 내어놓기도 하고 시금치를 무쳐 밥을 떠먹이기도 하고 빨래처럼, 뼈에 걸려 펄럭대는 그녀의 늘어진 허벅지에 구렛나루를 대어보기도 하다가 낡은 브라운관 안에서 열도의 지진 소식을 듣는다 신기하지요, 어머니 저 가느다란 땅에 저렇게 큰 울림이 있다니요 집 앞 연못에 작약을 심어야겠어요 어찌나 추운지 물결이 그대로 얼어붙었지 뭐예요 붉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