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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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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수필마당] 이흥수 - 사월은 사월은 찬란하고 서러운 사월이다. 동면에서 아직 덜 깬 불안한 삼월을 따돌리고 여기 저기 환한 꽃소식과 함께 완연한 봄으로 돌아왔다. 묵정밭에도 새싹들이 파랗게 고개를 내밀고 헐벗은 나뭇가지마다 연녹색 새잎으로 옷을 갈아입느라 분주하다. 누가 사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겨울이 쉽게 물러 설 수 없는지 며칠째 강원도산간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모처럼 피어난 여린 꽃잎들은 화들짝 놀라 서럽게 떨어지고 피멍이 들었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혼란한 세상이지만 사월은 푸르른 오월로 가는 징검다리다. 사월의 바람이 분다. 언뜻 스치는 바람결이 아직도 지난겨울을 내 마음처럼 놓아 주질 못하는 것 같아 애처롭다. 한식날에 함께 가자는 아이들의 말을 뒤로하고 이틀을 못 참고 굽이굽이 혼자 올라왔다. 모퉁이를 돌..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수필마당] 강대진 - 명당 명당 개 짖는 소리 조급하게 들린다. 살기마저 서려 있다. “컹컹” “컹컹” ……. 앞산과 뒷산이 울리고, 집 옆 숲속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던 멧새 떼가 푸르르 날아오른다. 개 짖는 소리만 선명하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해진다. 등골이 서늘해지고 아랫도리에 힘이 빠진다. 귀를 쫑긋하여 소리 나는 쪽으로 간다. 축대의 난간이 끝나는 지점에서 개는 너구리를 앞에 두고 맹렬히 짖고 있다. 얼핏 보아도 스키(내가 기르는 개의 이름)의 사냥은 손자병법에 통달한 장수의 솜씨다. 앞마당과 뒷마당을 떠받치고 있는 3m 높이의 축대는 북쪽에서 동쪽으로 굽었다가 다시 남쪽과 서쪽으로 뻗어 오목한 지형을 만들고 있다. 유일하게 트인 서북쪽은 스키가 “컹컹” 짖으며 지키고 있다. 축대의 돌 위에는 미국담쟁이덩굴이 악마의 손처럼 ..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수필마당] 김상미 - 적당한 거리 적당한 거리 코로나가 가져다 준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쪽으로 밀어 놓은 책을 손에 들게 했다. 이따금 읽고 있는 소설의 주인공이 나 같다는 생각이 들어 빠져들었다. 이웃의 삶을 모방하는 소설가들은 충분치 않음을 동원해 거꾸로 자신의 고유한 영토를 늘려간다. 생활력이 강하고 이웃을 자주 깔보는 아낙은 내 어머니 같고 경쟁과 온정 속에서 반목과 친목을 되풀이 하는 사람들은 내 이웃들과 닮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케릭터들은 꾸준히 맥박 소리를 내며 사람답게 군다. 책을 펼친 내 쪽으로 욕망을 안고 절름거리며 다가온다. 허영이 허영을 알아보듯 어떤 악은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아는 체할 뻔하기도 했다. 그들의 절뚝거림은 불편이자 경쾌함으로 다가왔다. 그 엇박자 안에서 어떤 흠은 정겹고 어떤 선은 언짢아 얼굴을 붉히기..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수필마당] 정훈모 - 인생의 그림 인생의 그림 결혼 47주년이라 삼척으로 여행을 갔다. 코로나 19로 세월이 수상한데 내 옆의 현실에서도 기막힌 슬픔을 바라보아야 하는 일이 생겼다. 외손녀가 갑자기 아파서 마음을 졸였다. 손주들이 방학이 연기되어 집에 있으니 두 아이들 돌봐주는 것도 힘든데 나들이를 못하니 답답해해서 떠난 여행이다. 동해 바다는 여전히 거기서 많은 말을 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삶이 견딜 수 없고 힘들 때 ”여행은 마음껏 할 수 있다’는 말이 가슴으로 훅하고 들어왔다. 항공사에 다니는 남자의 말이니 가능할 것 같았다. 20대 초반, 사는 게 녹녹치 않아 방황하고 있을 때 일간지의 ’오늘의 운세‘를 즐겨 찾아보곤 했다 그러다 “ 동쪽으로 가면 귀인을 만날 수 있다.”라는 문구를 보는 날은 은근히 누가 귀인일까 하며 ..
[계간 문파문학 2020 여름호 수필마당] 유혜자 - 당신의 벤치는 당신의 벤치는 거리를 지나노라면 곳곳에 놓인 벤치를 만날 수 있어서 나이든 처지에 반갑기 그지없다. 우리 아파트 입구에도 푸른 벤치가 놓여 있어서 들고 날 때마다 학창시절 동급생의 시구(詩句)가 생각난다. 맨 먼저 누가 꽃을 불러주면/꽃은 /터질 듯 분홍 손수건에 싸여/푸른 벤치로 다가간다./꽃은/우리가 가장 아파하고 우리 제일 서러워하는/… -w시인의 중 재학 중 시인으로 등단하고 예쁜 클라스메이트와 캠퍼스 커플로 알려져 주위의 부러움을 샀던 이 시인. 나는 이 시가 우수한 시로 평가받은 내용보다도 푸른 벤치라는 단어가 참신하여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 벤치는 서 있거나 오래 걸어서 피곤한 사람이 쉴 수 있고 의자와 달리 복수로 수용하여 만남의 장으로 대화가 허용되는 곳이기도 하다. 거기다가 푸른 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