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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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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정수안 - 동백꽃 동백꽃 매섭게 시린 풍상 한 가운데 온몸으로 사르는 투신 붙들기 위해 가지 사이사이 초록잎 손가락은 단단한 결기로 선홍빛 꽃 봉우리 피워 올리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꽃술과 꽃술을 오가는 동박새들의 축제는 용광로처럼 타 오른다 향기보다 진한 핏빛 연서로 엄동설한 한 시절 뜨겁게 살다 한 잎 흩트리지 않는 꼿꼿한 절개로 송이 채 몸을 던지는 주검조차 꺾지 못한 기개 환생을 꿈꾸며 대지로 스미고 있다 정수안 | 2020년 계간 『문파』 등단.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한여진 - 팔레스타인에서 팔레스타인에서 팔레스타인에서는 올리브로 반찬도 만들고 기름도 짜고 또 그 나무로는 묵주도 만든다고 한다 팔레스타인에 가야겠다고 오래 전부터 생각했다 이유는 딱히 없다 운이 좋으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올리브나무를 볼 수도 있겠지 그 나무를 봐야하는 이유가 꼭 있는 건 아니야 그래도 누구든 자신보다 오래 산 나무를 보면 하고 싶은 말이 한두 마디쯤 생길 수 있고 올리브 비누로 손을 씻고 너를 만나러 갔는데 그래도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요즘 같은 때에는 조심해야지 요즘 같은 때라니, 이 장면 속에서 나는 너를 지우고 지금 우리가 마주 앉아있는 심야식당을 지우고 가짜 벚꽃 인테리어 소품을 지우고 풋콩과 생맥주를 지우고 마스크와 손소독제도 지우고 올리브 나무만 기억할래 세계에서 가장 오..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조해주 - 시먼딩 시먼딩 눈앞을 지나가는 빛의 무리는 정말 오토바이일까 한 대의 오토바이가 푸르게 쌓아놓은 석과 더미를 무너뜨린다 천막 아래서 졸던 과일가게 주인이 놀라서 얼른 뛰어나오고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덩어리들을 주워 담기 시작한다 이 거 먹을 수 있는 건가 생각하면서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과육 석과에서 나온 하얀 속이 여기저기 덮인 바닥 눈앞을 지나가는 것이 정말은 무엇인지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고 마는 그것을 멈춰 세우는 순간 사람 머리 따위는 한 번에 날아가버리겠구나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젖은 손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부서진 석과는 부서지지 않은 석과와 함께 봉투에 가득 담겨있다 주인은 다시 자리에 앉아 부채질을 한다 부채가 몇 개인지 알 수 없도록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19년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선정 작가의..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김유태 - 앙장브망 앙장브망 서술어 없는 책을 읽는다 다리 없는 의자에 앉는다 발목이 사라지기를 즐기는 유령인 것처럼 의자의 주어는 유기되고 주어는 서술어를 은폐한다 연기 너머로 뒷모습은 가려진다 박하향은 새의 날개 사이로 흩어진다 태어나기도 전인 종의 예정됐던 변이처럼 듣기로 했던 음악이 달리 들리고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결론을 알고 있었던 것도 같아서 뒷모습 가로질러 존재하려 했던 그대의 새벽들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선회하다 없어진 그대의 발음되지 않은 진술들 자극 없이 감행되려 한 미미한 운동들 소년 앞에서 이미 울고 있던 소년들 태어나지 않고도 먼저 울고 있는 그대와 그대들 없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걸음을 찾아다니다 없는 눈물을 뿌려 없는 모닥불을 피워내고 유령은 눈물을 말리고 후생의 주어 안으로 배제되어 간다 불편..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오은경 - 물고기 물고기 횟집의 수조는 물때나 얼룩, 이끼 한 점 없이 깨끗하다 깨끗 해서 죽은 전어가 떠 있는 광경, 새우들이 가는 다리를 저으며 물보라에 싸이고 오르내리는 장면까지 셀 수 있다 방어는 한 마 리인데 좁은 수조 속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 빈 수조의 면적이 더 넓은 것 같다 횟집 주인이 호스를 집어 넣자 물이 차오른다 물은 거품과 뒤섞인다 보도블록을 타고 흐른다 사람들은 물 줄기를 밟고 저벅저벅 걷는다 짙은 발자국이 길가에 널린다 친구의 어깨가 닿는다 자리가 비좁다 맞은편에 앉은 친구들 자세도 불편해 보인다 서로가 어색한 듯 눈치를 보다가 이내 바쁘게 회를 집는다 친구들 정수리에 가려 접시에 회가 얼마만큼 남아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횟집은 만석이다 비가 수평으로 내린다 수조가 비어 있다 여러 개의 수조가 ..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강빛나 - 만지면 없는 당신을 가졌어요 만지면 없는 당신을 가졌어요 검지가 긴 나는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어둠, 만지면 없는 당 신을 가졌어요 기대를 물고 어린 봄처럼 당신을 가볍게 통과할 줄 알았나 봐요 어디에서나 나 전달법이 좋은데 대답은 머나요 당신을 많이 가져서, 아무 것도 안 가져서 목청을 새긴 창문 너머로 약지를 흔들며 사라지는 당신 말의 속도를 늦추고 아만다마이드 가진 것이 없어서 배부른 하늘 몰라서 좋았던 바닥 어쩌면 검지에 낀 담배연기의 저녁 잎들은 퍼런 먼지를 털며 살 속으로 미끄러지는 것 같아요 불안한 다리를 흔드는 당신보다 푸성귀를 좋아하는 토끼를 따를까요 당신의 주기는 반반으로 어우러지는 궁수자리, 그 아래 원죄 가 납작하게 자라고 있어요 바둑판은 고요할 때 숨을 참는지 뱉 는지, 반듯한 슬픔은 당신 눈에 띄지 않게 무..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전가은 - 데니 사이에서, 나는 인식한다 데니 사이에서, 나는 인식한다 낙타 등이 사막에 아득히 펴지는 날 주름진 짐들은 모래로 흩어지고 아이들은 탄호이저 서곡으로 들어갔다 한 세기 봄날을 들이기 위해 동토에서 아이들을 찾아가는 길이다 지축을 흔드는 채찍을 잡고 골짜기 틀어가는 계곡으로 나직나직 마중 가는 길 시절 따라 인연 따라 닦아놓은 길은 사라지고 길 들어진 절벽에서 사라진 말들을 불러 힘의 중심을 세운다 그날의 낮 열두 시처럼 개울물에 건져 올린 달빛에 영근 은행나무 아래에서 쑥부쟁이 옹알대는 탄호이저 서곡을 듣는다 전가은 | 2016 『미네르바』 등단. 시집 『스며들다』 『모래 위의 잠』. 평론집 『한국근현대 문제작가 평론』 등. 시예술아카데미상, 한국에세이평론상, 설총문학상 등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1 봄호 시마당] 이이향 - 말랑카우 말랑카우 말랑카우를 받았지요 아프다는 말은 타락(駝酪)인가요 아프고, 아끼는 동안 소식이 없어 말랑카우는 주머니 속에서 흰죽처럼 흐물해졌지요 추워진 시간들이 주머니를 기웃거리는 날이면 먹어치울 수도 없는 말랑카우를 꺼내 데운 우유처럼 후후 더디게 불었지요 어디일까 누구와 있을까 무얼 먹을까 몸을 부비듯 묻고 물어보는 소식들을 불어 녹이며 질문하는 시간쯤은 여기 두지 말아야지 끈적해지는 건 바보 같으니까 병든 약속 같은 건 멀리 쫓아 보내고 형체를 바꾸고 영롱히 녹아 없어지기를 푸른 바다로의 열망이 자결을 받들고 흘러가듯이 물음표 같은 건 너무 순수하잖아 말랑카우 같은 건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타락(墮落)인가요 라고 말하면 거짓말처럼 위로가 되지요 이이향 | 2016년 계간 『발견』 등단. 2020 엔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