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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1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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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여한솔-돌과 해부학 돌과 해부학 어깨가 아파 병원에 갔다. 의사는 적외선을 가져다 대고 잠을 자게 했다. 치료실 커튼 뒤로 굽은 뼈들이 잠을 자고 있다. 몸에서 흘러나온 생각이 몸의 중심을 뚫고 지나간다. 불어난 강줄기 몸은 어딘가로 간다. 병원이나 채광 아니면 차례를 기다리면서 줄 맨 끝에 도착한다. 작고 단단한 정을 들어 이마를 친다. 한 번씩 얼음처럼 부서지는 꿈을 꾼다. 공사장의 소음 벽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등 뒤에 있는 것 같다. 빗장 부수고 마음이 울린다. 건물 벽이 무너지고 있다. 구부러진 쇠 마지막 까만 골조를 상상한다. 돌가루가 가득한 바닥을 보면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고 폐허를 갖게 되었다. 마른 숲을 갖게 되었다. 조각품을 보고 싶다. 복숭아뼈를 만졌다. 마지막 여백이 아픈 어깨처럼 휘고 있다. 나는 기..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윤문순-잃어버리다 잃어버리다 거미줄 같은 선들이 눈에 거슬린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생활이 잠식당하고 있다 나무를 타고 오른 칡넝쿨 나무는 죽어가고 보이지 않는 선을 타고 흐르는 말들 장맛비처럼 쏟아지는 거짓된 정보들 나의 일상을 점유하고 판단되지 않는 모순들이 사고를 정지시킨다 화려하게 꾸며진 속삭임 눈먼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기대어 빠르게 파고들고 순간, 그들의 광대가 되었다 나무의 뿌리를 찾아 뒤엉킨 칡넝쿨을 걷어낸다 옥석을 가리듯, 나무도 나도 숨을 쉰다 윤문순 | 2020년 계간 『문파』 등단. 시계 문학회 사무국장, 문파 문인협회 회원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데이지김-올리브 숲 올리브 숲 올리브 나무가 푸르렀을 땐 흔들리기를 멈추지 않는 나뭇잎 사이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새의 지저귐이 나무의 직선을 타오르고 햇볕줄기의 후렴구가 장래희망처럼 흘러내렸다 검은 숲에서 넌 조용하게 팔이 길어지는 오늘을 아침 안개처럼 쏟아내는 중이었다 깊은 여름의 속도로 푸른 가지의 관절마다 덜 여문 열매를 가득 달고 너는 내내 흐린 마음이었다 길을 모르는 어둠 앞에서 부서진 어제를 보려고 숲속에 걸어 두고 온 낡은 램프의 손목을 생각했다 토막말처럼 꼬리를 자르며 숨는 도마뱀의 방향으로 식물의 발이 길어지고 있는 여름이었다 스무 살의 작은 잎사귀에 구름 주머니는 줄무늬를 그려 넣고 햇살의 뼈를 발라낸 숲의 흉터는 검은 맛이 나는 열매로 그늘을 채우고 있었다 데이지김 Daisy Kim | 2020년 ..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최숙자-황량한 집 황량한 집 둔촌동 북 카페 창밖에서 누군가 시선을 잡아당긴다 읽고 있던 문장들이 멈춰선다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잿빛 재킷 바람이 빈 소매에 팔을 끼우고 펄럭인다 누구의 몸을 벗어버리고 재킷은 저리도 아프도록 신음하는가 궤도를 이탈한 쓸쓸한 기억들이 나뭇가지에 쌓인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시간은 흐르고 매일 같은 자리에 갇혀있는 저 올가미 오랫동안 창밖, 그 자리에 있지만 없는 사내 사람들은 모딜리니아 여인의 긴 목으로 바라본다 바라보며 삼킨 체념들 늘 가위에 눌리는 꿈을 꾼다 우리는 왜 허공에 황량한 집을 지을까 혼자 견딜 수밖에 없는 시간 속에 내가 서 있다 최숙자 | 2019년 『미네르바』 등단.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이란자-아침을 걷다 아침을 걷다 새들의 날갯짓이 햇살을 뿌리면 아침노을이 동터오고 밤새 내린 이슬이 풀잎과 풀잎에 송골송골하다 침묵보다 고요한 안개 뽀얀 입김 밀어 올리자 옥수수 대 쑤욱 한 눈금 올라선다 쏴아 쏴아 대지의 숨결 초록 잎새에 스며드는 소리 이슬 젖은 촉촉한 황톳길을 아침이 걷는다 나를 넘으며 넘어서며 이란자 | 2019년 계간 『문파』 등단. 공저 『열한 개의 페르소나』 『달빛, 그리고』 외 다수. 문파문학 운영이사. 호수문학회 회원.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조윤진-사랑방캔디 사랑방캔디 두피가 저릿하도록 꽉 당신이 묶어 주었던 머리 네가 아이였을 때 그렇게 늙은 사람들만 보면 웃음을 터뜨렸다고 하도 왜요 물어서 그건 남의 나라 요라고 했다고 근데 할머니는 왜 했던 얘기만 해요? 우리 처음 만나는 사이처럼 당신이 따라 주었던 알로에 주스 방울끈의 고무줄이 늘어나고 끝내 그것을 잃어버리기까지 나는 너무 어려서 당신이 참 예뻤지 나는 늙고 싶지 않아서 당신의 말을 자꾸만 따라했지 조윤진 | 2018년 한국경제 신춘문예 등단.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김영곤-우기 우기 오백 일이 지나도록 이 비는 멈추지 않는다 점점 사나워진다 무대 스케줄로 꽃피우던 나의 바깥, 그 막다른 골목 귀퉁이마저 삼켰다 칼날 세운 시선이 하얗고 네모난 지붕 안쪽까지 빗발쳤다 우산처럼 뒤집히고 진흙바닥에 나뒹구는 인간의 날씨에는 언제나 고독이 멈추지 않는다 점점 불안이 격렬해진다 쓸모없어진 본업을 접고 마지막 남은 상자를 열었다 보이지 않으나 사라지지 않는 우산 하나 우산을 펼친다는 것 멈추게 하겠다는 것 우산도 외로워서 사람의 온기를 꽉 쥐려는가 내 손을 놓지 않는다 누군가의 우산이 된다는 것 더 이상 접혀 있지 않겠다는 것 당신만은 젖지 않게 하겠다는 것 움켜쥔 손에서 온기가 마르지 않는다 김영곤 | 2018년 『포지션』 등단. 논문집 『최문자 시에 나타난 여성성 연구』. 산문집 『밤이..
[계간 문파문학 2021 가을호 시마당] 주민현-방역 방역 플래시가 터진 필름 사진 속에서 우리는 옛날 사람 같다 별 기대 없이 나쁜 날씨를 산다 악몽을 향해 창을 연다 긴 벽에 난 작은 창은 위급상황에 깨고 나갈 수 없는 창이고 너른 풍경을 보여주지도 않는 등에 난 기억할 수 없는 점 같은 창 올봄 그 창은 메워졌고 우리가 너무 좋아했던 것은 우리가 외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입구에 두고 온 사람을 찾으려 미술관을 반대로 빠져나가고 있다 키치와 미니멀을 지나 리얼리즘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차가운 눈사람도 그림 속에서는 부드러운 털 짐승 같다 아직 전시가 시작되지 않은 미술관에 발자국 하나 유리문에 비친 광장의 시계탑에 비친 고급 부티크 상점의 종업원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곧 금지되었다 * 이 작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0년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선정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