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마당/2020년 봄호

(5)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수필마당] 박현섭-이사 가는 날 이사 가는 날 본디 지닌 모든 것에서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많다. 뚝 떼놓고 싶은 것 중 계절의 변화에 민망하리 만치 민감하다. 추위에 약하고 더위에 기진맥진하는 저질 체력 탓으로 다른 사람들은 별 탈 없이 잘 지나가는 여름 한 귀퉁이가 늘 허물어진다. 자물쇠를 닫아거는 현관 앞 현기증에 더위 탓이라고 억지 핑계를 대는데 책방인데 시집 한 권 보내겠다는 막내딸 문자다. 목젖에 차오르는 낌새를 용케 잘 알아채는 막내딸 덕분에 왈칵 솟구치는 눈물이 결국 계단을 헛잡게 한다. 며칠, 다스려지지 않던 속내가 비정할 만큼 어쩔 수 없이 모질어졌다. 오뉴월 땡볕임에도 가슴속은 서걱거린다. 사회이건 가정이건 무슨 일에서나 중심은 있게 마련이다. 그렇게 집단의 형평을 이루게 된다. 가족 구성원 중 맏이가 중심이라야 평화..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수필마당] 반승아-만종: L'Angélus 만종: L'Angélus 밀레의 그림 은 제목이 참으로 적절하다. 저녁나절의 종소리에 맞추어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은 소박하지만 경건하고, 겸손하지만 굳건하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어디에선가 뎅, 뎅 하는 낮고도 묵직한 종소리가 해질녘의 공기를 가르며 들려오는 것만 같다. 사실 이 그림의 원래 제목인 L'Angélus는 ‘삼종기도’이다. 삼종기도는 천주교에서 아침 6시, 정오, 저녁 6시에 바치는 기도이다. 삼종기도는 당시 시계의 역할도 대신했을 것이다. 분초를 다투며 살지 않던 시절, 사람들의 삶은 순박하고 단순했으리라. 날이 밝으면 일어나고 해가 중천이면 잠시 쉬고 어스름이 내리면 긴 그림자와 함께 집에 돌아오는 삶. 자연이 알려주는 흐름 속에 그 일부로서 살아가는 삶. 일용할 양식을 주신 신에게 감..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수필마당] 김세희-사랑한다면 사랑한다면 하늘이 깊어지는 계절의 문턱에서 그들은 우연히 만났다. 인연이 악연이 되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자연에서 맘껏 날아다녀야 할 장수풍뎅이는 벽돌 두 개 정도 펼쳐 놓은 크기의 방에 갇혔다. 여덟 살 천진난만한 아이가 자유를 갈망하는 곤충의 눈빛에는 관심이 있을 리 없다. 열 네 번의 낮과 밤이 반복되었고 아이는 큰 결심을 했다. 장수풍뎅이를 데려왔던 자연휴양림에 방생하니 숲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여덟 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장수풍뎅이는 자연으로 돌아가 흙이 되고 바람이 되었을 것이다. 진정 사랑한다면 상대방이 원하는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울고 있는 아이의 눈동자에서 아버지를 잃고 슬퍼하던 나를 발견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여름부터였다. 엄마..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수필마당] 김숙경-겨울 광교산 겨울 광교산 바람 소리가 파도 소리를 낸다. 텅 빈 나무 위에서 나는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다. 발목을 덮고 있는 낙엽과 잔설이 아직도 먼 봄을 기다리고 있는 듯싶다. 내가 사는 곳에 험하지 않으면서도 아늑하고 나지막한 산이 있다. 수원 시민이라면 한번쯤 손짓하는, 거부하지 못해 찾는 그런 산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광교산을 병풍 삼아 자리 잡은 우리 동네를 사람들은 축복 받은 일이라고들 한다. 공기처럼 가까이 존재하는 것에 감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도 그저 그런 산으로만 기억했다.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산으로만 알았는데 유명세를 치룬 듯 하루가 다르게 산을 찾는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뒤꼍에 자리 잡은 산처럼 여겨지는데도 마음먹지 않으면 산에 오르는 일은 쉽지가 않다. 남편과 큰마음을 먹고 오랜만에 둘만..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수필마당] 곽영호-기억의 그림자 기억의 그림자 어둡고 긴 겨울밤과 씨름을 한다. 어두움의 두께가 무시루떡처럼 두껍고. 뱀의 고리처럼 가뭇없이 길어 지루하기가 그지없다. 한 잠을 자고 났는데도 밤은 아직이다. 설친 잠에 끝없는 허무의 바다를 헤맨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했다. 젊은 날 그토록 모자라던 잠은 어디로 가고 힘겹게 건밤을 지새운다. 선하품 몇 번 하다가 그만 또다시 살얼음처럼 얇은 잠이 사르르 들어 꿈을 꾼다. 되돌아갈 수도 없는 시절의 공간으로 들어가 지난날의 보잘 것도 없고 아쉬움만 남는 기억이 흐늘거린다. 초등학교 때 교정이 단골 꿈길이다. 생시처럼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어둠침침한 긴 복도며 무섭기만 했던 선생님들의 교무실은 꿈속에서도 찔끔한다. 뒷마당 우유가루 끓여주던 자리가 제일 크게 보인다. 단추 없이 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