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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0년 봄호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수필마당] 곽영호-기억의 그림자

기억의 그림자

 

  어둡고 긴 겨울밤과 씨름을 한다. 어두움의 두께가 무시루떡처럼 두껍고. 뱀의 고리처럼 가뭇없이 길어 지루하기가 그지없다. 한 잠을 자고 났는데도 밤은 아직이다. 설친 잠에 끝없는 허무의 바다를 헤맨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했다. 젊은 날 그토록 모자라던 잠은 어디로 가고 힘겹게 건밤을 지새운다. 선하품 몇 번 하다가 그만 또다시 살얼음처럼 얇은 잠이 사르르 들어 꿈을 꾼다. 되돌아갈 수도 없는 시절의 공간으로 들어가 지난날의 보잘 것도 없고 아쉬움만 남는 기억이 흐늘거린다.

  초등학교 때 교정이 단골 꿈길이다. 생시처럼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어둠침침한 긴 복도며 무섭기만 했던 선생님들의 교무실은 꿈속에서도 찔끔한다. 뒷마당 우유가루 끓여주던 자리가 제일 크게 보인다. 단추 없이 배를 내보이는 내 모습이 측은하게 보인다. 꿈속에서도 냄새나는 변소청소를 하고 있다. 운동장에 앞산 만하던 플라타너스는 여전하다. 선생님의 목소리도 친구들의 음성도 들리지 않고 예쁜 꽃밭마저 검은 모양으로 보인다. 이상한 일이다. 자나 깨나 잊지 못하고 그리워 한 것이 정이 아니고 공간이었다.

  추억은 공간만을 기억 한다. 첫사랑이 이루어진 황홀한 떨림도 장소만 기억이 될 뿐 상큼한 젊음의 맛은 사라졌다. 푸른 계절 오월, 군복 입은 군인이었다. 수원 서호방죽 옆 푸른 지대 딸기밭 원두막에서다. 석양을 가리는 가리개를 내려놓고 입맞춤을 했다. 장소만 생각나지 서로의 눈빛이며 내가 했던 말, 그가 했던 말은 생각나지 않는다. 사랑의 정물화를 그린 그림만 남았다. 짜릿함이나 달콤했던 느낌은 온데간데없다. 알맹이는 없어지고 껍데기만 남은 꼴이다. 간직하여야 할 사랑의 그림자가 가물거린다.

  교통사고로 몸을 다쳐본 적이 있다. 자유를 가질 수 없는 참담한 순간이었다. 사고가 난 장면만 생각나지 이후 어떻게 처리 되고 어떻게 고통을 참아 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몸으로 겪는 아픔이나 정신적 고통이 생각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좋은 망각이다. 잊힘이 없이 아픔의 고통이 오래가는 것은 가혹한 징벌이다. 과정을 잊고 정황만 남은 것은 다행이다. 무심한 듯 어정거리는 시간이지만 영약하게 과거를 묻어준다. 삶의 고통은 얼음 녹듯 하여 진절머리 나던 순간일지라도 그림자 없이 사라진다.

  겨울비가 소리 없이 내린다. 간혹은 고독해지고 싶을 때가 있다. 우산을 쓰고 무작정 길을 걷는다. 문뜩 외로워 누가 달려들어 우산을 맞잡아 주었으면 하는 망상을 한다. 그러나 그럴 사람이 없다.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떠났다. 꿈을 같이 하던 학창시절 동문들. 동고동락하던 군대의 선후배. 더불어 살자던 사회 사람들 생각이 안 난다. 모두가 하나같이 기억 저편. 흘러간 물이요 스쳐간 바람이다. 존재는 했지만 그림자 없는 무영탑이다.

  유독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가 있다. 저 세상으로 가신 어머니 품이다. 엄마의 품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끊임없는 투정도 지나가고 보니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이었다. 오직 남은 것은 소금에 절여진 오이지처럼 오므라진 어머니의 가슴뿐이다. 어머니는 나무요 나는 푼수 없는 바람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생트집을 부리는 바람에 마지막 어머니의 몸은 뼈만 남은 앙상한 나뭇가지였다. 이야기가 서러워 슬픈 영혼이 어둠속에서만 왔다 갔다 한다. 희미한 기억의 그림자가 서럽다.

 

 

곽영호: 2007년 계간 『문파』 수필 등단. 수필집 『나팔꽃 부부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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