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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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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이란자 - 빈터 빈터 산더미같이 큰 회오리 거친 바람을 퍼 부었다 생각의 빈 가지 쳐 내리고 뼈 속 깊이 웅크린 붉은 파편 소용돌이치며 부서졌다 미세먼지처럼 숨 막히는 일상의 권태로움 휘몰고 사라진 빈터에서 뒤틀린 몸짓 깃을 세우며 곧 터질 것 같은 파란 하늘 쳐다 본다 긁힌 둔턱엔 뽀오얀 새살 돋아나고 씻어놓은 쌀처럼 정갈한 모래위로 향기 머금은 물빛이 번진다 버들치 물가에 모여들며 가뭇가뭇 둥그런 춤을 추고 어린 백로의 가녀린 하얀 깃털 한 눈 큼 자라나는 초가을 장미빛 햇살 촘촘히 내려앉는다 이란자 | 2019년 계간 『문파』 등단 .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이종선 - 영란정 영란정 앞만 보고 산길 걸으며 산허리를 감싼 안개 속으로 나도 모르게 깊이 빠져 든다 가픈 한숨 태우며 오르고 오르다 까칠한 바윗돌에 걸터앉아 늙은 소나무 붙잡고 향기를 더듬어본다 혼자 걷는 불곡산길 힘들어도 달개비 꽃 눈동자 거기 있을 것 같아 작은 마음으로 둘러보는데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영란정 무거운 바람은 끈적끈적한데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 아프다 그대 붉은 나뭇잎으로 아무도 모르게 가슴 흔들면 맑은 눈으로 가을하늘 쪼으며 날아오르는 한 마리 멧비둘기 이종선 |2019년 계간 『문파』 등단.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김지연 - 펼쳐지는 집 펼쳐지는 집 흰 선이 더러워지는 속도에 놀라게 되겠지. 흰 선만 밟으면서 건너는 거야, 이것이 오늘의 규칙이라면. 길을 걷고 길을 건너서 더 멀리 가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라면. 충분히 흰 선이, 새하얀 선이 없는 건널목 앞에서. 집은 완벽하게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주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아파트 광고 위로 지나가는 문구를 보고 있는 우리, 환한 방에서 눈을 뜨는 우리는 집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이불은 너무 부드럽고 너무 깨끗하고 누구나 쉽게 베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 시간은 계속 도착하고 있고 미래는 끝없이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 우리가 망가지는 데엔 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려주면서. 섬을 산 사람은 섬 전체를 거대한 정원으로 만들고 싶어 했대. 여기서 식물들은 날씨를 ..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김은자 - 숨 고르기 숨 고르기 일기예보 없는 소나기 퇴근길 비에 버무려진 땀, 흠뻑 젖은 남자 타조알처럼 단단히 설계한 보석 같은 서류 가슴에 품고 휘청휘청 뛴다 헐떡이던 구두 혓바닥 쩍 – 갈라졌다 마트에서 구입한 단 한 켤레, 허쉬파피 브랜드 지문 기적처럼 살아 희미하다 미처 마르지 못한 구두 발바닥 어제 흘린 생의 땀방울 올라와 마루 끝 이끼처럼 붙어있다 해를 거듭하며 세종청사에서 서울 국회를 오가는 동안 어긋나고 뒤틀린 보도블록에 차인 구두 콧등 움푹움푹 살점 떨어져 나갔다 휘청거리는 나라 세우느라 노후대책 완전할 수 없는 노부모 아들로 살아가느라 한 가정의 기둥으로 뿌리내리느라 맑고 투명한 남자, 늘 새벽 별 앞세웠다 허리 구부려 소파에 밀어 넣은 밤 헤아릴 수 없었다 3급 부이사관 승진 보도되던 날 국회 앞마당 ..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김장호 - 갈대 갈대 은빛으로 쏟아지는 눈썹달이 그림자를 흘리며 걸어가는 실개천에 하늘거리는 너는 헤어지던 날 그녀의 손 짓 노을에 담긴 이별이 벌겋게 젖은 목젖으로 넘어 갈 때 두어 번의 손짓을 빌려주듯 울고 간 너는 그렇게 빼닮았다 시간을 털고 갈바람에 실려 떠나던 날 또 돌아보며 멀어지던 샛강에서 다시 온다 약속 하던 하얀 인사 네가 돌아와 늙은 햇살에 기대 날 기다리는 날 그 진주 빛 만남을 나는 기대한다 하이얀 머리칼로 보다 더 가여운 너를 나는, 그렇게 또 온통 사랑하리라 김장호 |2018년 계간 『문파』등단. 시집 『묵은지와 겉절이』외 2권. 한국 문인협회 회원.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신새벽 - 파도는 연습이 없이 밀려온다 파도는 연습이 없이 밀려온다 우리의 연애는 솟구치는 분수 같았지 아무런 고백도 들은 적 없지만 깊고 아주 깊은 곳 슬픈 파랑을 끌어와 커다랗게 몸을 뒤집으며 소리 지르지 사랑의 뒤편도 멀쩡하기를 바라는 바보는 아마도 나뿐인 듯 해 점점 불시착하는 너의 감정을 난 절반으로 나누고 위험하지 않은 번역으로 난파 되어 밀려드는 조각들을 끌어안고 맞추고... 먼 곳 수평선은 멀쩡히 그곳에서 우두커니 지켜보고만 있어 우리의 가장자리는 늘 안부를 모른체 서두르고 출렁이지 고요를 훔치지 않은 건 연습이 부족해서 일지도 몰라 바람의 행적은 누구라야 볼 수 있는 건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너에게서 멀어지는 연습이 될까 그저 바라보고 서서 침묵으로 견뎌야 하는 같은 모습 같지만 전혀 다른 모습..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정우신 - 너 그러다가 시 쓴다 너 그러다가 시 쓴다 ─수현에게 J는 생각했다 방포해수욕장의 아이들 제멋대로 튀는 땅강아지들 불꽃놀이 쓰레기와 소주병들 쓸모에 대해 불씨가 남아있는 화로 호일에 쌓여있는 것은 감자일까 고구마일까 손목일까 자갈일까 도박도 안했고 죄지은 것도 없는데 왜 나는 여기까지 흘러왔을까 방파제에 온전히 붙어있는 고동들 버려진 횟감과 가시들 그것은 어딘가 닮은 점이 있지 기분이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는 그런 게 있지 J는 생각했다 눈사람을 녹이며 쏟아지는 오로라 사이 흩어지는 자신과 움켜쥔 주먹으로 새어나오는 모래들 쓸모에 대해 식어가는 것과 뜨거워지는 것을 구분해야할 때가 온 것이다 J의 눈빛과 섞여 반짝이는 물빛 바람의 빈 목을 찾아보는 방울들 무언가에 홀린 낚시꾼처럼 J는 했다 ڷ 詩 정우신 | 2016년 『현..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조미희 - 옥수수가 자란다 옥수수가 자란다 들판에 이빨이 돋아난다 자라는 것들이 태양을 삼키고 무쇠처럼 강해지는 계절, 늘어진 개 혓바닥 사이 송곳니가 옥수수밭 밖으로 걸어 나오는 안데스산맥의 바람을 와자작 씹는다 어미의 젖꼭지를 질끈 무는 아이는 이제 어떤 씨름판에서도 지지 않을 것이다 높은 곳을 향해 함성처럼 빠진 이를 던지고 구멍 난 소원을 빌어본다 부러지지 않는 희망을 달라고, 세상에 부러지지 않는 희망이 있을까 들판에 무성하게 희망이 자라고 기차가 계속해서 빈곤을 메아리로 던져놓는 여름, 제물 대신 이를 던져주고 이름을 지키며 살았으니, 옥수수수염이 다 새도록 청빈함이 재산이 된 초로의 노인이 옥수수를 수확한다 자신이 던진 함정에서 와르르 이빨들이 쏟아진다 조미희 | 2015년『시인수첩』등단. 시집 『자칭 씨의 오지 입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