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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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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최형심 - 만약 만약 양철로 된 바람이 있다면 그 바람 위에 막 발자국을 찍은 구름이 있다면 번호판 대신 당신의 이름표를 달고 달리는 차가 있다면 그리하여 낚싯대를 드리우고 떠돌이 꼬마별들을 낚을 수 있다면 찔레꽃에 물린 뱀의 투병기를 읽다가 어느 유월에 떠난 사람과 깍지를 끼며 안녕, 인사할 수 있다면 그를 보낸 밤을 빨랫줄에 걸어 보송보송 말리고 깡통 가득 찬 별들을 툭툭 따며 한밤을 보낼 수 있다면 무릎 위에 쏟아진 별들 위로 아주 오래전에 삼킨 들숨을 후후 뱉어낼 수 있다면 첫 번째 봄과 마지막 봄을 맞바꿔주는 고물상이 있어 한 사람을 잃고 열차가 떠난 뒤에도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사랑의 뫼비우스의 띠가 있다면 달그림자에 베인 고양이 귀에 바람을 감아주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유리창에 내린 별과자를 아그작 씹을 수 있..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강정임 - 매화 茶 매화 茶 사과 반알 만한 옹기 찻잔에 불을 품은 전등알만큼 따끈한 물을 붓자 화들짝 놀라는 한 송이 꽃 맨살에 내린 서리, 견뎌낸 아픔 깊숙이 감추며 봄을 알린 귀한 인연 저버리고 우려내는 잔혹한 마음 시리다 시치디 뚝 떼고 마시기엔 주춤 거리고 그냥 밀어 놓기엔 아쉬움 남아 눈을 감고 향을 맡는다 나무꾼 손등처럼 투박한 찻잔 복사꽃 빛 잔 받침에 고이 앉았는데 마시라며, 속눈썹 끔벅거리는 매화 한 송이 강정임 |2007년 『문학마을』 등단.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연세대 사회교육원 교수역임, 향원 꽃 리서치 연합회 회장.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김성규 - 하루 전날 하루 전날 짐을 나르는 그의 뒤에 죽은 사람이 서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지독하게 지쳐 쓰려졌을 때 그는 슬픔을 느꼈을까요 잠들기 직전 펜을 잡고 써봅니다 내가 바라는 게 무엇이었는지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쓰러져 잠에 빠진 날 죽은 사람이 나를 보고 서 있습니다 잠 속에서 나는 느낄 수 있습니다 다음 날, 아니면 그다음 날 그만두어야 함을 알지만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한 줄 써봅니다 아무리 고통을 당해도 마음은 단련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이 내 이마를 쓸어주고 있습니다 김성규 |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신동엽문학상, 김구용문학상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고영민 - 쇠 냄새 쇠 냄새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고 나서 한 말은 내가 쉽게 죽을 줄 알아, 였다 아버지는 쉽게 죽었다 방금 전 철봉에 매달렸던 손에서 쇠 냄새가 난다 나는 왜 계속 손바닥을 맡아보는 걸까 쇠 냄새를 고영민(高榮敏) |2002년 『문학사상』 등단. 시집 『악어』 『공손한 손』 『사슴공원에서』 등. 박재삼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등 수상.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김미정 - 블라인드 블라인드 벌어진 햇살 사이로 손가락을 넣는다 눈 감고 뛰어내리는 창문의 비명들 차례로 쌓인 계단의 신호음이 사라진 시간을 깨운다 몸을 옆으로 돌리면 더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여러 번 익숙한 자세로 너와 나 사이 빗금을 그으며 허공을 당긴다 종이를 만지다 손이 베어진 느낌으로 침묵을 가늘게 채 썰어 그늘에 넣고 감아올리는 행위는 내일의 반복이다 말없이 빠져나간 나를 훔쳐본다 떨리는 눈꺼풀은 불안을 날리고 안에서 밖을 보며 생을 중얼거린다 옷을 벗고 태양을 내린다 물컹한 바람의 고백이 구겨진다 김미정 | 2002년 『현대시』 등단. 시집 『물고기 신발』 등.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문숙 - 힘줄 힘줄 아프게 치켜든 팔이 힘없이 툭 떨어진다 “어깨 힘줄이 끊어져 염증이 심합니다” 그동안 내 팔을 자유롭게 했던 것이 힘줄임을 몰랐다 밤마다 통증으로 알약을 삼켜야만 잠이 든다 엄마 떠난 그때도 그랬다 힘없고 아파서 긴 시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내 영혼의 힘줄이었다 의사는 주변 근육을 키워서 힘줄처럼 써야 한다며 운동법을 알려준다 “살살 달래가며 해야 합니다 때로는 악하고 비명소리가 날만큼 아파도 포기하면 안됩니다” 몸도 마음도 끊어진 힘줄들 때문에 살맛을 잃었다 주변인 같은 당신이라도 살살 달래가며 내 힘줄이 되는 그날까지 문숙 | 2000년 『자유문학』 등단. 시집 『단추』 『기울어짐에 대하여』.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김종태 - 히라노 신사의 벚꽃 히라노 신사의 벚꽃 축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가 유치원생처럼 작아진 노파를 휠체어에 얹은 가족이 줄지어 종종걸음 신사로 들어오고 약수터 흐르는 물소리가 잦아들 무렵 얼마 안 남은 생의 안쪽을 들여다보듯이 백발 노파는 포옥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이제 이승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의 끈을 날줄 삼아 그 위로 벚꽃의 시간을 씨줄로 엮는 마음들 꽃잎의 분홍 그림자가 거무죽죽 저승꽃을 물들이듯이 연분홍 솜사탕을 든 소년이 죽순 구이 입에 문 소녀를 바라보듯이 여기저기 스쳐 지나가는 삶의 향연들 시간의 행렬들 오늘밤 저 꽃들 중에 절정의 음역에 닿는 것 또한 있을 것이다 아무리 깊어진 봄이더라도 꽃이 진 자리에 다시 새로운 꽃잎들이 피어나진 않을 것이다 벚꽃 진 옆 자리, 그 옆옆 자리서 살살 흔들리는 ..
[계간 문파문학 2020 겨울호 시마당] 이경 - 커다란 새장 커다란 새장 커다란 새장을 들고 날아야 하는 새가 있다 억조창생을 먹여 살리는 새 닭은 왜 날개가 있는데 날지 못 합니까 새벽마다 높은 가지에 올라 하늘에 고하는 소리 맨드라미꽃보다 붉은 상소문 새벽이 풀어 내리는 흰 두루마리 위에 선혈 뚝 뚝 저걸 시라고 해야 하나 푸른 색 천장을 가진 커다란 새장 이경 | 1993년 『시와시학』 등단. 시집 『소와 뻐꾹새소리와 엄지발가락』 『푸른 독』 『오늘이라는 시간의 꽃 한 송이』등. 유심작품상, 시와시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