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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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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수필마당] 이종미 - 다 뻥이었어요 다 뻥이었어요 연속극을 보다가 이십년도 더 지난 이야기가 떠오른다. 소낙비 내리던 여름날, 낮선 아주머니를 열 받게 해놓고 태연하게 자리를 뜬 창의적이지만 엉뚱했던 그 아이. 웹툰 작품이 안방극장으로 들어왔다. 김새로이와 조희서가 주인공인 ‘이태원 클라쓰’다. 두 주인공의 공통점은 약자 앞에 정의롭고, 강자 앞에 절대로 무릎 꿇지 않는 소신파이지만 소시오패스에 가까울만큼 지나친 정의주의자다. 금권력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마저 잃은 김새로이가 길을 가던 중 어떤 아주머니한테 폭행을 당하는 조희서를 만난다. 8월 한여름 어느 날이었다. 배고픈 시어머니 낯 색 버금가던 오전 날씨와 달리 점심식사 후 드디어 보슬비가 내렸다. 뽀얗게 먼지 입은 나무들도 모처럼 온몸 뒤적이며 목욕하느라 분주하다. 우산도 없이..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수필마당] 이순애 - 호사(豪奢) 또는 好事 호사(豪奢) 또는 好事 자연의 맛을 본다. 동쪽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짭조름함을 깊이 음미한다. 잉태 되었던 모태에서의 친숙함이 먼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다. 남쪽마당의 숲을 뚫고 달려온 솔바람은 머리를 노크하고 가슴을 열게 해 강한 의지가 솟아오른다. 그 의지의 힘을 입은 손길로 구석구석 풀을 매고 꽃을 심는다. 꽃은 이미 사랑과 향기를 약속 했노라 땀을 뿌린 만큼씩 자라난다. 사람의 가슴에 사랑이 되고 삶의 희망이 되어 하루가 기쁨으로 다가온다. 호사다. 한 생명의 태어남은 하늘만큼 부푼 기대를 안겨준다. 그것이 꽃 한 송이라 해서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님을 안다. 대모님이 꽃모종을 한 묶음 주면서 꽃이 피면 예쁘다고 심어보란다. 한 개씩 갈라 나란히 심었다. 뾰족한 잎을 힘차게 뻗쳐 꽃이 어떻게 생겼..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수필마당] 김윤희 - 건들팔월 건들팔월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 했던가./들녘 일손 잠시 쉼을 갖는 농촌의 8월은/신작로 미루나무에서 매미소리 요란 했고,/덩달아 꿈을 키우는 젊은 열기가 후끈했다. 까마득히 잊고 있던 초등학교 동창회,/농촌을 지키며 농사일을 거들던 친구도/객지로 나가 생활전선에 뛰어든 친구도/상급학교 진학한 친구도 격의 없이 뭉쳤다. 콩나물시루 속, 빼곡했던 한 교실 친구들이/졸업사진을 찍던 그 교정에 다시 모여들었다./구레나룻 거뭇거뭇 훌쩍 자란 친구가 새롭고/고운 꿈 꼭꼭 땋아 내린 갈래머리가 함초롬하다.’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의 흑백사진을 본다. 초등학교 동창회가 열렸다. 졸업한 지 불과 5년 전인데 친구들의 모습은 많이도 변해 있었다. 단발머리 철부지들의 모습은 간데없고 처녀총각 티가 물씬하다. 당시 고등학교..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수필마당] 손경호 - 진주반지 진주 반지 결혼 때 아내에게 준 선물은 수정(水晶) 반지였다. 얼마 안 되어 그 반지에서 알이 빠져나가 잃어버리고 낙담하고 있을 때, 나중에 진주 반지를 다시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진주가 보석 중에 여왕 대접을 받는 아주 귀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진주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미려한 외관이나 희귀성 때문일 것이다. 무기질 탄소의 다이아몬드도 귀하기는 하지만 유기화합물인 탄산칼슘의 진주와는 전혀 다르다. 산 사람이 살아 있는 원소의 보석을 만나는 궁합은 찰떡궁합일 거다. 궁합이 잘 맞는 부부여야 살아가면서 사랑의 깨가 쏟아진다고 한다. 모래밭의 조개 안에 모래알이 들어가면 조갯살이 이물질에 반응하며 자기 몸을 방어하려고 체액을 분비하여 에워싼다. 모래알을 바깥으로 내치지는 못하고 긴긴 세월 몸 안에 품은..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수필마당] 오정순 - 열정의 산물 열정의 산물 무엇이 길을 내는가. 무엇이 하는 일에 열매 맺게 하는가. 나는 왜 무엇에 마음이 꽂히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가. 빗소리 굵어서 밖을 내다 볼 수 없을 즈음이면 찻잔을 들고 앉아 직진하는 그 힘의 뿌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꿈속에 까지 쳐들어 와 나를 점령하던 것들은 결국 끝을 보고 나서야 물러선다. 6세 때 내가 살던 집은 공터에 덩그러니 한 채 있는 관사였다. 사람과 사귀어야 할 나이에 나는 곤충과 잡초들을 친구 삼아 성장하였다. 지금도 바랭이, 왕바랭이, 도꼬마리, 까마중, 왕비름 등의 풀이 내 눈 앞에서 살랑대며 말을 걸어온다. 아는 만큼 보이고 친숙한 만큼 다가가게 되는 만큼 나는 식물에 대한 애정이 그런 연유로 남달랐다. 초록이들이 내 시야에 있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