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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0년 가을호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수필마당] 이종미 - 다 뻥이었어요

다 뻥이었어요

 

 

연속극을 보다가 이십년도 더 지난 이야기가 떠오른다. 소낙비 내리던 여름날, 낮선 아주머니를 열 받게 해놓고 태연하게 자리를 뜬 창의적이지만 엉뚱했던 그 아이. 웹툰 작품이 안방극장으로 들어왔다. 김새로이와 조희서가 주인공인 ‘이태원 클라쓰’다. 두 주인공의 공통점은 약자 앞에 정의롭고, 강자 앞에 절대로 무릎 꿇지 않는 소신파이지만 소시오패스에 가까울만큼 지나친 정의주의자다. 금권력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마저 잃은 김새로이가 길을 가던 중 어떤 아주머니한테 폭행을 당하는 조희서를 만난다.

8월 한여름 어느 날이었다. 배고픈 시어머니 낯 색 버금가던 오전 날씨와 달리 점심식사 후 드디어 보슬비가 내렸다. 뽀얗게 먼지 입은 나무들도 모처럼 온몸 뒤적이며 목욕하느라 분주하다. 우산도 없이 뜀박질하던 동네 꼬맹이들이 어찌나 신나서 소리를 지르던지 덩달아 흥분한 보슬비는 굵은 비를 데려왔다. 여름에 내리는 빗소리는 묘한 음률이 있어 참 좋다. 빗소리를 감상하며 유리창 너머 놀이터로 시선을 두다 깜짝 놀랄만한 장면을 발견했다.

10대 초반 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을 낯익은 아주머니 한 분이 잡으려고 전력질주를 한다. 여학생은 잡힐 듯싶으면 놀이터 밖으로 도망쳐서 보이지 않다가 사라졌나 싶으면 다시 놀이터로 들어온다. 거리감이 있어 표정은 볼 수 없지만 아주머니가 뒤쫓는 것으로 보아 좋은 일은 아닌 듯싶다.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나도 모르게 안도하다가도 다시 나타나면 불안한 것은 잘은 모르지만 아이가 잡히지 않기를 바랐나 보다.

주룩주룩 비 내리는 텅 빈 놀이터에 아주머니 혼자 기둥처럼 서 있다. 잠시 후 마치 연극의 1막이 끝나고 다음 배우가 등장하듯 또 낯익은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 들어간다. 얼마 전까지 엄마 까치와 아기까지 네 마리가 살던 소나무 아래를 지나간다. 여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소낙비를 쫄딱 맞으며 미동도 않는다. 아기가 감기 걸릴까봐 안되겠다 싶어 수건과 우산을 챙겨 들고 나가니 아기가 반긴다.

빗소리와 흥분한 그녀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릴락 말락 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그렇다. 아기와 산책하던 중 문제의 여학생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어떤 오빠들이 돈을 빼앗아 갔다고 울먹였단다. 그 녀석이 누구냐고 묻자 눈을 들어 여기저기 찾다가 아파트 앞 슈퍼마켓을 지나는 두 남자아이를 지목했다.

오지랖 넓은 이 아주머니는 네 살배기 자기 딸은 그 자리에 놓고 한여름 후텁지근한 공기를 가르며 달려가 두 아이를 붙잡았다. 다짜고짜 빼앗아간 돈은 어서 내놓고 사과하라고 했다. 붙잡힌 아이들이 미쳤냐고 소리 지르며 대들어 몸싸움이 일자 슈퍼마켓 아주머니가 뛰어나와 말렸단다. 아이들은 그런 적 없다고 펄펄뛰고, 슈퍼마켓 아주머니도 그런 아이들이 아니라고 증인섰다. 오지랖 넓은 아주머니가 정신을 차린 후 신고자인 여학생을 찾았지만, 저 멀리 네 살배기 자기 딸만 뎅그러니 세워놓고 사라진 것이 아닌가. 두 아이한테 머리 숙여 사죄하고, 슈퍼마켓 아주머니의 끌끌 차는 혓소리를 뒤로 하고 돌아서니 숨어있던 여학생이 얼굴을 내밀었다.

 

 

 

 

 

 

이종미 | 2011년 『에세이포레』 신인문학상 등단, 한국문인협회 정보화위원, 에세이포레문학회 편집위원, 수필집 『그 여자 쥑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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