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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0년 가을호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수필마당] 이순애 - 호사(豪奢) 또는 好事

호사(豪奢) 또는 好事

 

 

자연의 맛을 본다. 동쪽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짭조름함을 깊이 음미한다. 잉태 되었던 모태에서의 친숙함이 먼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다. 남쪽마당의 숲을 뚫고 달려온 솔바람은 머리를 노크하고 가슴을 열게 해 강한 의지가 솟아오른다. 그 의지의 힘을 입은 손길로 구석구석 풀을 매고 꽃을 심는다. 꽃은 이미 사랑과 향기를 약속 했노라 땀을 뿌린 만큼씩 자라난다. 사람의 가슴에 사랑이 되고 삶의 희망이 되어 하루가 기쁨으로 다가온다. 호사다.

한 생명의 태어남은 하늘만큼 부푼 기대를 안겨준다. 그것이 꽃 한 송이라 해서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님을 안다. 대모님이 꽃모종을 한 묶음 주면서 꽃이 피면 예쁘다고 심어보란다. 한 개씩 갈라 나란히 심었다. 뾰족한 잎을 힘차게 뻗쳐 꽃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 날마다 들여다본다. 뻐꾹새 소리가 유난히 창가를 흔들던 날 마당에 나와 보니 유월의 아침햇살아래서 나를 보며 활짝 웃는 난초 한 송이가 곱다. 자지러질 듯 숨이 멎을 것처럼 탄성을 울린다. 생전 처음 대면인데 손톱만한 것이 꽃분홍색으로 곱기도 고와 사랑스럽다. 꽃을 유난히 사랑한 어머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해 입었던 치마저고리 색이라 더욱 놀라웠다. 이 작은 한 송이 꽃에 마치 나도 꽃처럼 고운 드레스로 치장한 듯 착각이 들 정도의 황홀함이다.

숲을 찾아 온 새들도 사랑스럽다. 날마다 그릇에 물을 채워 새들이 들락거리며 먹고 가는 것을 보게 되니 그들과 나의 기쁨이다. 시골에 와서 처음에는 경계의 빛이 역력 했으나 점점 다가와 가까운 나무에 앉아 노래를 불러준다. 모두 생김새가 달라 이름을 찾아본다. 곤줄박이 박새 때까치 딱새 멧비둘기 방울새 굴뚝새 등 각자의 특징이 있고 언어도 다르다. 서로 부르며 멀리서 날아와 함께 모인다. 곤줄박이 열 댓 마리가 떼로 와서 꽃 석류 잎 사이사이를 숨바꼭질하듯, 쇼를 하듯 뱅글뱅글 한참을 돌다가 날아간다. 같은 종들끼리 어울리며 놀고 있다. 밤이면 논산이 서식지로 나의 고향 새인 소쩍새가 창가에 날아와 안부를 전한다. 새들이 불러주는 노래는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즐거움을 선물로 주어 사랑의 도가니에 풍덩 빠뜨리고 만다.

새벽이 되면 앞집 장 닭의 울음소리가 우렁차다.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라는 신호다. 새벽뿐 아니라 하루 종일 때때로 울기도 한다. 여러 암탉 속에서 인기 만점으로 사랑하기 바빠 신나는 노래인 듯하다. 해가 저물어서야 새벽을 기다리며 깊은 잠에 든다. 어둠이 밀려오면 밤마다 개구리들의 합창이 잠속에서 리듬을 탄다. 바다에서 습한 안개가 날아와 살갗으로 숨 쉴 수 있어 내세상이라며 온 집안이 떠나가라 노래 부른다. 신기하게도 그들의 악보에 여러 군데 쉼표가 있는 듯하다. 뚝 그쳤다 다시 시작하기를 모두가 함께 반복하는데 반 박자도 틀리지 않는다. 커다란 고무 함지박을 땅에 묻어 왕골풀과 연을 심어 개구리가 살게 해놓았다. 새끼를 까서 올챙이가 고물고물 크고 있는 모양이 사랑스럽다.

미물이 아닌 소나 개 같은 짐승들은 사람과의 교감이 크다. 예전 시골 친정집에서는 짐승을 많이 길렀다. 어머니는 사람에게 하듯 짐승들을 사랑으로 대해 꼬리를 흔들며 다가와 반가워했다. 또 논밭을 가는 소는 고생을 한다고 말하며 알뜰히 살피고 쓰다듬어 사랑해 준다. 하루 종일 논을 갈고 소는 달구지에 짐을 싣고 돌아오게 된다. 주인은 그 짐을 나눠지고 같이 걸어온다. 1960년대 한국의 농촌모습을 본 『대지』의 작가 펄벅여사가 있다. 소달구지에 타지 않고 왜 짐을 지고 걸어가느냐고 묻는다. 농부는 오늘 우리 소가 일을 많이 해 짐을 나눠지고 간다고 대답하자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서양 사람들은 당연히 소달구지를 타고 가기 때문이다. 감을 열 개 쯤 남겨놓은 이유를 묻자 까치밥이라는 소리를 듣고 세상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풍경들이라며 감탄했다. 짐승들에게도 호사가 있다. 사랑과 인정이 넘치는 모습에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은 고적이나 왕릉이 아니라 바로 이런 모습이라는 것이다.

땀과 고통 없이 사랑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면 행복해 지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란 것을 알게 된다. 말이 없지만 땀 흘린 노력의 대가인 꽃을 보면 즐겁고 기쁨과 사랑이 샘솟는다. 마음이 상쾌해 진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하며 꽃은 사랑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다. 돈 명예 권력으로 완전한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 자연은 사랑의 향기를 보장해준다. 그래서 자연을 만든 이 앞에 고개 숙이게 한다. 모든 것은 그 분의 사랑.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자연의 사랑에 믿음을 갖게 해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호사다.

 

 

 

 

 

이순애 | 2010년 계간 문파등단. 시집 예감수필집 그때 그리고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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