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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0년 가을호

[계간 문파문학 2020 가을호 수필마당] 오정순 - 열정의 산물

 

열정의 산물

 

 

무엇이 길을 내는가. 무엇이 하는 일에 열매 맺게 하는가. 나는 왜 무엇에 마음이 꽂히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가. 빗소리 굵어서 밖을 내다 볼 수 없을 즈음이면 찻잔을 들고 앉아 직진하는 그 힘의 뿌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꿈속에 까지 쳐들어 와 나를 점령하던 것들은 결국 끝을 보고 나서야 물러선다.

6세 때 내가 살던 집은 공터에 덩그러니 한 채 있는 관사였다. 사람과 사귀어야 할 나이에 나는 곤충과 잡초들을 친구 삼아 성장하였다. 지금도 바랭이, 왕바랭이, 도꼬마리, 까마중, 왕비름 등의 풀이 내 눈 앞에서 살랑대며 말을 걸어온다. 아는 만큼 보이고 친숙한 만큼 다가가게 되는 만큼 나는 식물에 대한 애정이 그런 연유로 남달랐다. 초록이들이 내 시야에 있어야 안정을 찾는 나는 20대에 이르러 식물도감과 화훼도감을 그리면서 내 안의 초록이들을 풀어냈다. 일생을 관통하는 반려식물 사랑을 책으로 이관하고 사랑이 조율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만난 탁구는 나를 단박에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반듯한 바닥만 보면 탁구공을 두드렸다. 책받침 두 개를 붙이고 동생들에게 애기 띠를 양쪽에서 들게 하고 내 아래 동생과 마루에서 탁구를 쳤다. 아버지에게 탁구채를 얻기 위해 커피를 약처럼 마시면서 공부를 하였고 병사부를 끼고 사는 내 친구네 집에 수도 없이 들락거렸다. 탁구사랑은 학창 시절 내내 따라 다녔고 결국 체육과가 없는 대학에서 나는 학교대표 선수로 체육대회에 뛰어 연속 2년에 걸쳐 우승을 하였다. 선의의 경쟁이라지만 우승을 향한 타인의 기대감에 질려서 이후 나는 탁구채를 놓아버렸다. 무엇이든 오래 즐기면 노하우를 스스로 터득하면서 하나의 기능을 얻게 되고 기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면 서야 해서 뜨거운 경험도 갖게 된다.

만화책을 짐자전거로 실어다 이불 속에서 본 결과는 내가 작가생활을 하는데 통찰력 부분이 자란 시간이 되었고 11살 때부터 곱돌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빈 종이만 보이면 아무거나 그리며 혼자 놀던 나는 결국 최종직업이 디자이너였다.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미술반 활동 권유를 받았지만 거부하고 생물 선생님을 도와 현미경 사진을 그렸다. 그 때 익힌 기능으로 출판문화에 혁신이 일어난 때 디자이너로 일했으며 내 손은 금손이었다. 그 금손도 10년 동안 기저귀 빨고 설거지 하는 동안 세상은 내 손을 필요로 하지 않게 변했다. 백과사전에 수석디자이너 이름 석자 적어놓고 마무리 되었다.

오늘로 나는 1205편의 글을 발표하고, 27년간 한 곳에서 봉사하고 한 신문사의 필집으로 15년간 활동하다가 놓았다. 눈이 벌겋게 충혈 되어 다니면서도 필력은 시퍼렇게 살아있었다. 순전히 재능이 아니라 열정의 산물이었다. 미진한 듯해도 열망이 밀고 가는 바람에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다. 뛰어난 재능을 무시할 일은 아니나 호기심을 가지고 즐기고 반복하는 힘으로도 길이 난다. 나는 신묘하게도 길이 막히면 에너지를 응축하여 저장하였다가 어느 순간 무른 땅에서 올라오는 새순처럼 기회만 되면 기운이 샘솟는다. 힘들어도 화가 나지 않고 끙끙거리기는 해도 그것 자체를 즐기는 편이다. 집중하는 힘에 의해 중도하차 할 기회를 놓치는 셈이다. 이제는 열정의 조율키를 작동할 시기에 당도하였다.

 

 

 

 

 

오정순1993년 『현대수필』 신인상 등단. 수필집 『그림자가 긴 편지』 『나는 사람꽃이 좋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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