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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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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한준석-데생 데생 동경하는 토르소 팔꿈치를 핥을 수 없는 혀를 달고서 물어뜯은 손톱을 가만히 바라봐 이번 생은 실패일까 너를 안고서 놓치는 상상을 해 잠깐 환해지는 안쪽 위험한 모습으로 자세가 무너져 그건 이미 내가 가진 소문이고 조용하게 엎질러져 있는 너를 보며 우리의 입안은 뾰족한 단위로 이루어진 걸까 비 내리는 오후처럼 금이 가는 바깥은 몸에 감싸기 쉽고 세수를 하는 아침은 화장실 불을 켜지 않는 일이 많아져 턱을 괴더니 부서지기 쉬운 무게 같아 현관문을 열어놓고 나가는 애인처럼 예감으로 가득 찬 두 다리를 팔로 끌어안으면 나는 나에게 자꾸만 해로워지고 있어 발가락만 조금 꼼지락거리면 아, 날아간다 나는 멈춰 서서 흘린 그림자가 있어 한준석 | 202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등단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남수우-오렌지 빛 터널 오렌지 빛 터널 내게도 허락된 창턱이 있었다 날마다 그것을 딛고 넘어오는 것은 빛 다음에 어둠 그리고 다시 빛 연기가 자욱한 날에도 둘 중 하나를 기다렸다 어둠 다음에 빛 시간이 흐를수록 커피 잔은 식어간다 커피를 다 식히면 시간도 멎을까요 빛이 넘어 간단다 저녁 아래 나는 잠들어 있었다 잠 아래 내가 촛불을 태운다 맞은편 창가에는 늙은 사람이 턱을 괴고 앉아 들릴 듯 말 듯 불 아래서 중얼거리고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창턱의 다알리아는 붉은 잎을 하나씩 떨어뜨렸다 시간이 속을 태우기도 하나요 빛이 넘어갈 뿐이란다 꽃잎이 검붉게 말라갈 무렵 나는 잠에서 깼다 흰 천장 아래로 고작 이십 분이 흘러 있었다 사람들은 친절했다 나는 딸기 두 송이를 훔쳐 달아났다 집 앞 문턱을 넘으면 으깨진 딸기즙이 두 손 가득 ..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조효복-떠도는 잠 떠도는 잠 젖은 아기들이 오네 물 위를 떠도는 가방들 아기들의 잠은 가벼워 수초들은 조금씩 몸을 키웠네 물고기처럼 자주 놀라 울음을 잊은 아기들 살이 무른 풀들도 숨죽여 가방을 끌어안았지 바람의 말에 순종하며 가만히 흔들렸지 잠이 닿은 그곳에선 언덕을 쌓고 해와 함께 달리겠지 툭툭 털어낸 햇빛이 발가락 사이에 고이겠지 네 함성이 무늬를 갖고 이야기가 생길 거야 밤이 오면 달빛에 몸을 말고 자장가를 나누겠지 먼동이 트고 기별은 없고 울음뿐인 몸들이 수로를 헤매네 빈 요람이 흔들리네 가방 속 아이들아 지문을 잃고 어둠을 삼키며 얼굴보다 큰 슬리퍼를 끄는 아이들아 세워도 세워도 미끄러지는 껍질을 깬 발룻*에서 검푸른 불꽃이 피네 엉긴 부리의 울음을 끌어안으면 노랑 승합차가 긴 조문을 떠나네 * 부화 직전의 오..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류휘석-지구 멸망 브이로그 지구 멸망 브이로그 늦잠 자고 일어났는데 아무래도 지구가 망한 것 같다 꿈이겠지 집도 무사하고 잘 때 켜둔 텔레비전에서 여전히 소리가 나고 있으니까 그러나 화면에는 놀랍도록 발전한 기술력으로 놀랍도록 쉽게 망해버린 지구가 송출되고 있었다 살아남은 인류는 집에 숨어 텔레비전을 틀어두고 기도했다 주인공이라면 어떻게든 구원해줄 거라고 믿었는데 잠깐 부엌에 간 사이 인류 마지막 주인공이 죽었다 나는 솜이 다 터져 나온 소파에 앉아 고추참치를 먹으며 주인공이 쓰러지는 장면을 보았다 잠시 송출이 멈췄다가 악당의 다음 행선지로 화면이 전환되었다 익숙한 주택가의 익숙한 건물을 지나 악당은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악당 앞에 섰다 화면에 내가 동의 없이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정말 주인공이 ..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노혜진-지금의 우정 지금의 우정 나는 이층에 산다. 밤에 잡곡빵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일층 입구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았다. 못 보던 얼굴이었다. 나의 창문 아래로 빵을 던진다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질 것이었다. 토스트기를 통과하지 않은 빵을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속도로 먹으며, 그를 지나치던 순간을 떠올렸다. 남자는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이 건물 앞에서라면 다들 서 있었지만 그는 계단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기다리는 것 같았다. 무리를 지어 다니거나 뭉쳐 있는 사람들의 거리에서 건물의 둘레를 자신만으로 채우고 있었다. 두 칸이 전부인 계단에 잠시 살고 있는 것일까.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자세와 달랐다. 오래도록 머무르려는 것 같았다. 다음 날에는 남자의 등을 보았다. 쭈그리고 앉아 부스럭거리고 있었는데, 커다란..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박세랑-누가 너를 이토록 잘라 놓았니 누가 너를 이토록 잘라 놓았니 응급실에서 눈을 뜬 아침, 절망이 동공을 힘껏 긋고 지나가는데 등이 구부정한 아버지가 곧 사라질 것처럼 희미한 표정으로 내 곁에 앉아 있다 얘야 무엇이 왜 이토록… 너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니 병실 침대 맡에서 아버지의 눈빛이 흐릿하게 묻고 있다 아버지 달이 자꾸만 커지는 게 무서워서요 새벽녘에 커다란 보름달이 목을 졸라댔거든요 자세히 보니 달은 창백하게 얼어붙은 내 과거의 눈동자였어요 그걸 쳐다보고 있자니 동공이 깨질 듯이 쓰라려서요 싸늘하게 겪은 일과 시퍼렇게 당한 일 사이에 걸터앉아서 손목을 사각사각 깎아냈을 뿐인걸요 연필 가루처럼 후두둑 떨어지던 피가 어느새 통통한 벌레로 변하더니 바닥을 기어 다니던데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기어이 발설하기 위해서 뾰족하게 깎아지른 손목..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홍계숙-그 거리의 히말라야시다 그 거리의 히말라야시다 낯익은 집들이 낯선 나무들의 곁으로 배치된 도시는 이 거리로 인해 삼척이다 가로수가 펼쳐놓은 도로 위로 자동차가 굴러가고 낮과 밤이 굴러 가고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태엽이 풀리는 거리, 이 거리 바깥에는 아 파트를 심고 날마다 물을 주어 도시의 키가 나무를 훌쩍 넘었다 직립의 체위를 바꾸는 그림자, 스치는 불빛에 가로수는 도열의 순서를 교체한다 그림자를 바닥 에 눕히고 체스처럼 한 나무가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면 다른 나무 는 뒤로, 뒤로, 후퇴하는 밤의 놀이로 거웃도 턱수염도 검어진 나무의 방언이 익어가고 4차선 분량의 밤하늘에 달빛과 자동차 불빛이 교차한다 불어오는 바람은 무거운 삶을 지고 산맥을 오르던 셰르파들, 고산지대를 누비던 히말라야인이 이곳에 정착했을까 사철 초록 어..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이주현-빈방 빈방 빈방 침대에 햇살이 내려와 쉬고 있다 화병에 백합 향기는 방 안 가득하고 코끝은 향기를 빨아들이고 바람은 빨좀하게 열린 창문사이로 날개를 접고 들어온다 산뜻한 시어들 꼬불꼬불 백지 위를 걸어 다니고 산들바람은 책장을 넘긴다 이주현 | 2016년 계간 『문파』 등단. 시집 『가고 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