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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1년 여름호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시마당] 류휘석-지구 멸망 브이로그

지구 멸망 브이로그

 


늦잠 자고 일어났는데 아무래도 지구가 망한 것 같다 꿈이겠지 집도 무사하고 잘 때 켜둔 텔레비전에서 여전히 소리가 나고 있으니까


그러나 화면에는 놀랍도록 발전한 기술력으로 놀랍도록 쉽게 망해버린 지구가 송출되고 있었다


살아남은 인류는 집에 숨어 텔레비전을 틀어두고 기도했다 주인공이라면 어떻게든 구원해줄 거라고 믿었는데


잠깐 부엌에 간 사이 인류 마지막 주인공이 죽었다 나는 솜이 다 터져 나온 소파에 앉아 고추참치를 먹으며 주인공이 쓰러지는 장면을 보았다


잠시 송출이 멈췄다가 악당의 다음 행선지로 화면이 전환되었다 익숙한 주택가의 익숙한 건물을 지나


악당은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악당 앞에 섰다 화면에 내가 동의 없이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정말 주인공이 다 죽어버려서 결국 나까지 주인공이 돼 버렸다 이런 걸 주인공으로 해도 되나
나 같은 게 주인공이라 악당이 분량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악당은 더 화려한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휴전을 선언했다 나는 오래전 금강태권도에서 배운 기본기밖에 몰라서 그거라도 탄탄하게 단련하기로 마음먹었다 친구가 복싱장 나오라고 할 때 나갈 걸 후회했지만 친구도 복싱장도 이미 다 사라진 후였다

 

처음 뒤돌려 차기에 성공했을 때,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악당이 무차별적으로 건물을 부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화면으로 쏟아지는 듯한 악당의 생동감 있는 기술에 감탄하기 바빴다


악당의 분량은 점점 더 늘어났다 악당이 기업 건물을 부술 때마다 (의도한 건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이후의 인터뷰에서도 악당은 의중을 밝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악당이 부순 기업이 얼마나 악랄했는지에 초점을 맞춰 중계했다 관련 증언자들을 모아 토크쇼를 열기도 했다 악당과 주인공의 분량에 따라 인류는 환호하기도 절망하기도 했다 허름한 츄리닝을 입고 다리를 찢다 주저앉거나 힘없이 허공에 손을 뻗는 내 모습은 십 초도 채 나오지 않았다


부술 건물이 몇 남지 않았을 때, 나는 악당의 화려한 필살기(전력을 쏟는 척한)를 맞고 쓰러졌다 악당은 협찬받은 명품 운동화로 내 얼굴을 밟고 소리쳤다
“이제 너희에게 남은 건 비참하게 쓰러진 주인공뿐이다!”
정적이 흘렀다 지구 멸망 미리 보기 같았다 악당이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침묵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쳤다 텔레비전에선 이날의 사건이 가지는 상징성에 관한 토크쇼로 2부작을 찍었다 남은 건물 중 가장 큰, 국회의사당 앞에서의 일이었다


나는 내가 뱉은 피로 따뜻해진 바닥에 누워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편하게 쉬고 있었다 악당은 중간중간 내 생사를 확인했다 악당의 열성 팬에게 받은 물을 먹이기도 했다


나는 하루 전날 간신히 익힌 필살기를 쓰지 못한 게 너무 억울했다 억울했지만 그뿐이었다 차라리 실패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상하리만큼 편한 마음으로 나는 멸망 직전의 지구에 누워 악당과 악당의 팬들이 부르는 승전가를 들었다 대충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내용의 간결한 후크송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지구 멸망 직전 역대 최대 규모의 종교가 탄생한 날이었다 나는 이 모든 걸 누워서 지켜보고 있었다 새로 조립된 역사에 살아남은 인류가 맞물리는 모습을


악당은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기 위해 내 얼굴에서 발을 뗐다 나는 충분히 힘을 회복했지만 이대로도 좋을 것 같아 그대로 있었다 내친김에 잊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최종방어선을 구축하러 간 몇몇 엑스트라들과 그걸 저지하기 위해 출발한 악당의 추종자들이 우르르 사라졌다 나는 악당 쪽으로 몰래 고개를 돌려 희미해지는 악당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남아있던 주인공 담당팀 중 몇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참았다 질리도록 연습한 일이라 자신 있었다 가장 잘해줬던 메이크업 담당자가 크고 하얀 천을 덮어주고 사람들을 따라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악당이 끝내 국회의사당을 점거했는지 최종방어선을 구축하러 간 엑스트라들은 결국 뭘 얻어냈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여전히 지구의 마지막 주인공인 채로 나는 눈을 감고 숨을 참고

 

어서 이 모든 게 끝나버리길 바라고 있었다

 

 

곧 빛이 사라졌다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탁하고 꺼져버렸다

사람이란 것도 원래 숨 쉬지 않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멈추었다


지구가 멈추고 사람이 멈추고 송출이 멈추자

 

악당이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몰래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는 건지
악당에게 물어보려다가
뭐라고 부를지 고민하다가


“일어나. 이제 우리밖에 없어.”


악당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악당이 울었던가

 


 

나만 혼자
너무 오래 살아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자
모든 게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숨을 쉬고 있었다는 것도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도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필살기 못 보여준 게 너무 서러워서
나는 허공에 주먹을 휘둘러보았다

 

 

 

류휘석 |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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