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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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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수필마당] 정선이(박정희)-젊은 날의 추억 젊은 날의 추억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J의 귀국과 함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의 모임을 약속한 것은 가로수 잎들이 노랗게 물들어 가고 있는 지난 가을이었다. 성씨만 다를 뿐 이름도 같고 키도 비슷와한는 J 두 정희라고 불러주는 선생님들과 친구들부터 사랑과 관심 가운데 여고 시절을 보냈던 사이였다. 고향을 떠나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지내고 있던 J와 마지막 만남은 지방에 있는 약학대학 교수로 임명을 받았다는 소식을 알려온 그녀와 차 한 잔을 나누던 날이었다. 그렇게 헤어진 그녀가 약학대 학장직을 내려놓고 소록도로 내려가 10여 년을 봉사하던 그곳을 떠나게 될 때이다. 아프리카에 머물며 교육과 의료 봉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준 것은 원불교 신자인 친구들에게서였..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수필마당] 명향기-하나의 긴 여정 하나의 긴 여정 ‘달아나라. 집에서 나와라, 걸어가라. 뛰어가라.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그 자리에 두고 떠나라. 땅을 버리고 여행길에 오르라. 멈추는 자는 화석이 될 거야. 정지하는 자는 곤충처럼 박제될 거야. 심장은 바늘에 찔리고, 손과 발은 핀으로 뚫려서 문지방에 고정될 거야. 움직여, 계속 가,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니’ 폴란드 태생의 올가 토카르추크가 쓴 『방랑자들』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고 피가 요동침을 느꼈다. 인간은 생이 시작된 순간부터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의 한계에 쫓기며 소멸을 향해 하루하루 달려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사람과의 소통이 줄어들고 거리두기로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요즈음, 소모되는 시간을 집에 콕 박혀 흘려보내는 나야말로 박제된 ..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수필마당] 이흥수-보름달 보름달 지친 하루해가 소리 없이 사위어간다. 땅거미가 지는 저녁나절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다. 덩달아 바쁜 마음으로 아파트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다 잠시 숨을 돌린다. 무심코 올려다 본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는 휘영청 보름달이 훤하게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얼마만인가, 전염병으로 오래 동안 갇혀 지내느라 마음 놓고 밤하늘을 볼 수 있는 여유도 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보름달을 보고 나도 모르게 가벼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60년대 중반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객지 생활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외삼촌댁에 기숙하여 주거는 안정되었지만 서투른 교내 생활과 처음 겪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학교 마지막 수업..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수필마당] 김진진-원시적 시간 원시적原始的 시간 빈센트 반 고흐나 앙리 마티스, 마르크 샤갈이 즐겨 사용한 ‘코발트 블루’는 진청색이다. 고흐의 이나 마티스의 나 샤갈의 는 푸른색이 인상적이다. 신비함과 관대함으로 상징되는 이 색은 청결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차갑고 고독하며 성스럽고 아름다우나 때로는 도도하고 정열적인 느낌마저 발산한다. 1775년 루이 자크 서나드 등 과학자들의 협력으로 탄생된 안료다. 코발트는 약간 붉은빛이 감도는 강렬한 톤의 파란색 분말로 코발트라는 귀한 광석을 사용하여 만들어내는 화합물이다. 지금도 중요 생산지는 고대 페르시아로 불리던 이란이다.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는 코발트를 유액에 넣어 만든 푸른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8세기 이후 중국으로 수입되어 청화백자 같은 고급도자기가 유럽의 명문가들에게 팔..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수필마당] 문육자-우이도의 바람 우이도의 바람 선상에서 기적처럼 만난 의 아주머니는 혀를 찼다. 식구들이 모두 목포에 살고 있으니 예약 손님이 없으면 목포에서 지내다 민박집엔 철새처럼 한 번씩 들르는 걸 알면서도 연락 없이 오다니…. 같은 배를 탔으니 망정이지 어쩔 뻔했느냐는 아주머니의 말에 바람이 꼬드겨 훌쩍 떠나왔다는 변명을 목젖으로 삼키며 웃기만 했다. 아주머니 얼굴에 반가움이 역력함을 놓치지는 않았다. 목포에서 하루에 한 번 뱃길로 4시간. 다도해 국립해상공원의 해역에 우이도는 자리 잡고 있다. 자동차는 허용되지 않고 마냥 흙길을 걸어야만 하는 곳. 섬시인 이생진 선생님을 따라 처음 발을 디딘 이후 우이도를 끊임없이 그리다 민박집 아주머니의 지청구를 들으면서까지 불쑥 찾아가곤 한다. 지난번 사흘을 계속해서 비에 젖은 채 창을 두..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수필마당] 이경선-모냥 지키기 모냥 지키기 가끔 나이를 꼽다 보면 순식간에 숫자가 불어난 것처럼 화들짝 놀라곤 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건만 조심해야 할 부분도 보태지니 서글프다는 푸념이 마른 호흡 속에 배어 나온다. 어른 노릇 하는 것이 쉬운 게 아니라는 말처럼 체면, 위신 위해 감수해야 하는 부분도 발생하고 아랫사람에겐 표본을 보이며 행동에도 자제를 해야 잘 익은 어른이란 평가를 듣게 된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그동안의 정서나 사고가 하루아침에 어른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젊은 세대의 문화를 동경하고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제 막 시니어 대열에 진입하는 ‘어쩌다 어르신’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고 외양만 늙어버린 청춘이다. 하지만 그 속내를 보여줄 방도가 희박하니 우린 어쩔 수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