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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1년 여름호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수필마당] 정선이(박정희)-젊은 날의 추억

젊은 날의 추억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J의 귀국과 함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의 모임을 약속한 것은 가로수 잎들이 노랗게 물들어 가고 있는 지난 가을이었다. 성씨만 다를 뿐 이름도 같고 키도 비슷와한는 J 두 정희라고 불러주는 선생님들과 친구들부터 사랑과 관심 가운데 여고 시절을 보냈던 사이였다.

 

고향을 떠나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지내고 있던 J와 마지막 만남은 지방에 있는 약학대학 교수로 임명을 받았다는 소식을 알려온 그녀와 차 한 잔을 나누던 날이었다. 그렇게 헤어진 그녀가 약학대 학장직을 내려놓고 소록도로 내려가 10여 년을 봉사하던 그곳을 떠나게 될 때이다. 아프리카에 머물며 교육과 의료 봉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준 것은 원불교 신자인 친구들에게서였다.


오랜 시간 소식을 나누지 못하고 지내다가 KBS <아침마당> 출연을 위하여 귀국한 그녀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은 몇 년 전이었다. 아쉬움이 남는 안부 통화만 나누었을 뿐이었기에 소식을 전하여 준 H와 함께 그녀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서
둘러 약속한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이다.


하얀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입은 넉넉한 미소의 J와 수십 년 만의 만남이다. 만나지 못했던 긴 시간 동안의 안부를 묻던 그녀가 “정희야! 네 모습이 있는….” 하며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인다. 깊숙한 곳에 간직하고 있던 낯이 익은 얼굴이 있는 사진을 찾아내어 들고 온 그녀에게 내가 먼저 연락하지 못한 미안함으로 말을 잊고 있으려니 미국인과 결혼하여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있던 M이 조금 후에 도착한다는 전화가 왔다.


아산 재단에서 주는 의료봉사 상을 받기 위하여 귀국한 J의 소식을 듣고 옛 친구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기 위하여 때맞추어 귀국한 M, 그리고 우리 모두는 여고 2학년 때 잊지 못할 추억의 밤을 함께한 친구들이다. 학생들에게 극장 출입도 자유롭지 못하고 제과점에서 여학생과 남학생이 만나는 것도 금기시하던 시절에 이웃 남학교 3학년생들과 함께 하였던 크리스마스이브의 추억은 잊을 수가 없다.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 약속한 장소에 모인 우리들이 향하는 곳은 모임에 함께 하고 있는 친구의 사촌이 예약하였다는 제법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는 제과점이었다. 오락부장이라는 남학생의 소개로 어색하고 쑥스러운 인사가 끝나고 장기자랑으로 이어지며 차례에 따라 밴드 마스터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앙코르encore를 받고 있을 무렵이었다. 누구인가 “훈육 선생님이다.” 하고 부르짖는 소리에 모든 것을 중단하고 가까이 위치하고 있는 교회의 뒷동산에 올라 눈을 맞으며 통금이 해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귀가를 했다.


친구들과 마지막 날을 친구 H의 집에서 보내기로 한 저녁시간이다. 고향을 떠나 멀리 있었던 친구들을 위하여 팥죽을 준비하고 있는 그녀 곁에서 우리들이 나누던 화제의 중심은 50년이 훌쩍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한참 유행하던 Nat King Cole의 <Too Young>을 불렀던 학생의 이름과 아직도 귓전을 울리고 있는 트럼펫 소리며 통금이 해제되기를 기다려 몇 분의 선생님 댁을 찾아 새벽 송을 불렀던 일들의 추억이다. 아름다웠던 젊은 날의 추억을 나누며 구도자의 길도 삶의 무거운 짐도 잠시 내려놓은 우리들은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정선이 |2016년 계간 『문파』 수필부문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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