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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마당/2021년 여름호

[계간 문파문학 2021 여름호 수필마당] 명향기-하나의 긴 여정

하나의 긴 여정

 

‘달아나라. 집에서 나와라, 걸어가라. 뛰어가라.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그 자리에 두고 떠나라. 땅을 버리고 여행길에 오르라. 멈추는 자는 화석이 될 거야. 정지하는 자는 곤충처럼 박제될 거야. 심장은 바늘에 찔리고, 손과 발은 핀으로 뚫려서 문지방에 고정될 거야. 움직여, 계속 가,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니’

 

폴란드 태생의 올가 토카르추크가 쓴 『방랑자들』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고 피가 요동침을 느꼈다. 인간은 생이 시작된 순간부터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의 한계에 쫓기며 소멸을 향해 하루하루 달려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사람과의 소통이 줄어들고 거리두기로 단절된 삶을 살고 있는 요즈음, 소모되는 시간을 집에 콕 박혀 흘려보내는 나야말로 박제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에너지는 움직임에서 비롯된다. 자전거 바퀴를 돌려 전기를 만들듯 움직여야 에너지도 생기고 의욕도, 욕망도 생겨남을 알 수 있다. 관습과 타성에 젖어 익숙한 것만을 찾는 이상, 더 이상의 모험이나 행복을 갈구하지 않게 된다. 저자는 우리를 쉼 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여행이야말로 인간을 근본적으로 자유롭게 해 줄 수 있음을 역설한다. 또한 우리가 머무는 공간, 우리가 움켜쥐고 있는 소유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삶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님을 일깨운다.


『방랑자들』은 한마디로 여행기이다. 인생이란 결국 하나의 긴 여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을 관통하는 궁극적인 주제는 ’여행‘ 혹은 ’방랑‘이다. 이것을 주제로 하여 타인과 교감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글쓰기의 가장 큰 매력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독립된 조각 글마다 소제목이 붙어 있고 다중 화자가 등장하며 형식도 제각각이다. 다양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저마다의 이유로 여행길에 오른 다채로운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 그들은 어딘가로부터, 무엇인가로부터, 누군가로부터, 혹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사람들, 어딘가를, 무엇을, 누군가를, 혹은 자기 자신을 향해 다다르려 애쓰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타인과의 경계, 거리, 혹은 단절에 대한 성찰의 기록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는 낯선 나라, 낯선 사람, 낯선 문화와 끊임없이 맞닥뜨리지만, 그 대면이 피상적인 접촉에 그치는 것을 경계하고, 직접 오감으로 인지하고 체험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행이란 단순히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횡단하는 물리적인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내면을 향한 여행, 묻어 두었던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시도, 시련과 고통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또한 여정에 포함된다. 잘 아는 선배님 한 분은 몸으로 부딪치고 오감으로 느낀 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울려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시간을 내어 현지로 달려가시곤 한다. 그러기에 글은 생동감이 넘치고 살아있는 글이 된다. 어쩌면 ’방랑자들‘이란 표제어도 멈추지 말고 뛰어가 경계와 단절을 허물고 소통과 공감의 오늘을 살아야 하는, 우리 모두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명향기 | 2015년 『한국수필』 등단. 『시선』 시 등단. 수필집 『간격의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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