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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당/202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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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한재범-오프사이드 오프사이드 오래 사귄 친구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징그러운 말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우린 매일 오래된 동네 피시방에서 만났지 흡연석 마주 편에서 코를 막고 게임했지 좋아하는 선수들로만 팀을 짜는 축구 게임 각자의 열한명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좋아했다 우린 서로의 유일한 라이벌 골키퍼와 골대를 욕하면서 치고받았다 네 골키퍼 정말 미친 것 같아 노이어도 그렇게 막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뭐래 더 좋은 팀 쓰는 주제에 작년 여름 우리나라가 독일을 이겼지 나도 기뻤어 나도 우리나라 사람이니까 게임에선 독일 국가대표를 썼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손흥민의 군 면제를 모든 국민이 원했지 너도 그 국민 중 하나였을까 지금 너는 군대에 있다 말뚝을 박겠다고 네가 은퇴할 때쯤이면 손흥민도 그라운드에서 은퇴를 하겠지..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정재율-사랑만 남은 사랑 시 사랑만 남은 사랑 시 읽다가 책을 덮었다 사랑이 모자라서 눈들이 깨끗해지기 위해 창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더 많은 사랑을 위해 창문을 그렸다 컵을 던져도 깨지지 않는 책장에 쌓이는 먼지처럼 손으로 쓸어도 날아가지 않는 풍경들을 뒤로 한 채 겨울이 되면 재가 흩날리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창문에는 죽은 생명체들이 입김처럼 불어나고 덕지덕지 얼룩들이 생긴다 컵을 던지면 분명 손잡이가 깨졌는데 멜로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사랑에 실패해도 다시 새 삶을 살 수 있었다 더 청렴해진 마음으로 빗방울을 그렸다 붓과 물감으로 더 자세하게 그렸다 사랑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사랑을 하고 싶어서 열심히 창문을 닦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써진 편지를 발견했다 턱을 너무 오래 괴어 팔꿈치가 아파왔다 새 구절을 ..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이만영-나와 당신과 레인코트 나와 당신과 레인코트 여름 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목록 중 비의 냄새만으로 장밋빛 잠에 취하게 만드는 비법을 알고 있다고 당신은 깔깔거린다 노란 레인코트의 당신을 본 그날 이미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고 여름의 와인 잔 속으로 알몸을 텀벙텀벙 빠뜨리며 거짓말처럼 이 계절이 영원히 끝나버리지 않기를 바랐는데 나와 당신과 레인코트 그리고...... 미안해, 뭔가 썩 어울리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어 레인코트를 걸친다는 건 빗방울 소리로 세상을 뒤덮는 일이고 축축한 시선의 무단침입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했지만 숲으로 빚은 바람과 먼바다를 스쳐온 바람의 차이만큼 처음부터 우리 태생이 달랐던 건 아니었을까? 가끔 당신은 레인코트 대신 우산을 집어 들곤 했지 나는 더러워진 레인코트를 분리수거함 통에 구겨..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설하한-물그릇에 담긴 시 물그릇에 담긴 시 한낮의 역 화장실 세면대 말끔히 말라있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가득 찬 페이퍼타올 빈 휴지통 기르던 개가 문 너머 공기를 두어 번 응시한 사이 내놓은 편지뭉치들이 사라졌다. 눈 위에 점이 있는 개들은 유령을 본다고 했다. 물들이 거리에 선을 긋는다 우산으로 뛰어 들어온 손종 소리가 구두를 적신다 어떤 것들은 사라진 후에야 명징해지나 우린 수면에 비친 서로의 얼굴 대신 둥근 물웅덩이만을 기억할 따름이라 발이 축축하였다 마른 구두로 돌아오는 길 역 화장실 여전히 말끔한 세면대와 빈 휴지통 세계 둥근 물그릇 같은 나는 안녕했으니 좀처럼 알 수 없는 얼굴에서 표정을 잡기위해 연애를 할 것이었다 1. 물그릇 이가 나갔다 비를 다 맞으며 수레를 끌고 있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는 표정이 없었다 세계..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권기선-힘들다는 말은 가장 순수한 표현이었어 힘들다는 말은 가장 순수한 표현이었어 기분이 좋아도 웃지 못했어, 좋지 않을 날들을 먼저 걱정해서 밝은 전망 근사한 조명의 카페 세련된 사람들 “내일 지구가 멸망하면?” 이런 깔끔한 불안은 아니라서 어지러워서 바보 같다고 말할지 몰라, 아마도 그렇겠지 예를 들면 나는 여행을 망설였어 내 행복과 아버지와 어머니를 저울질했어, 우리 가족은 여행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먹고 사는 일이 먼저 그런 건 티브이에 나오는 여행 프로그램으로 충분해 유명한 사람들이 대신 가서 보여주니까 우리 가족의 여행은 방안에서 이루어졌으니까 “내가 여행을 누려도 될까.” 어쩌면 내 우울은 여기서 시작된 건지 몰라 고요한 마음으로 사상을 사랑을 충전하고 싶어 아련한 일이 아냐 슬퍼하려는 일이 아냐 그것보단 자꾸만 사진을 들여다보는 일 ..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박민혁-그 후 그 후 오래전부터 나를 미행하며 관찰한 소회는 마냥 슬프다고만 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삶은 자꾸 차악(次惡)의 방향으로만 흐른다. 이리 온. 나는 위로하고 싶다. 꿈에 들린 국숫집에서 나이 든 주인 남자는, 살갑게 마주하는 너와 나의 혀가 텅 비었다 말하고, 나는 발끈한다. 그는 다만 따뜻한 국물을 사발에 더 부어줄 뿐이다. 시 깊숙한 곳에 너를 밀어 넣는다. 의도치 않은 죽음에 휘말려 시체 한 구를 필사적으로 숨기듯이. 너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이제는 도무지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면, 마침내 네 이야기를 시작해도 좋을까. 미사여구 한 줄로 풍경 따위를 요약하는 일은 이제 하지 않는다. 시 한 편을 위해서도 갖은 인프라가 필요하다. 이 무렵 나는 사소한 친절에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겁을 줘 쫓아낸..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김유림-그리고 커다란 오후의 장난감 거미 그리고 커다란 오후의 장난감 거미 그리고 커다란 오후의 장난감 거미를 옥상에서 본다 오후지만 어두워서 오후의 끝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저녁은 아니다 그 속에 커다란 감정이 들었지만 흔들기엔 대낮이었다 옥상이라 누가 안 볼 확률이 높았지만 누가 볼 경우도 커다란 오후 안 들어 있었던 것 같다 하늘색이랑 비슷한 옥상은 하늘색과 난간으로 정확히 구분되고 있어 다행이다 사람이 잘못 걸어 나가는 경우도 생각해야 하는 게 힘들다 물론 잘못이나 실수는 서로 다르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사람들 말고 사람만 만나보면 둘을 혼동하는 경우가 잦다 내가 그 거미를 장난감이라고 착각한 것은 그 거미가 열대에서나 볼 법한 통통하고 털이 숭숭 난 거미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음 커다란 장난감 같다는 오후의 거..
[계간 문파문학 2020 봄호 시마당] 조창규-수목한계선 수목한계선 겨울 하늘의 작은 별들은 추워서 얼면 눈의 결정이 되어 내린다. 조금씩 쌓인 눈이 나뭇가지를 부러트리듯이 나는 너에게 잦은 상처를 주었고, 네 눈 속에 가득한 별들은 녹아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네가 외국으로 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렇게 너와 헤어진 줄 알았지만. 폭설로 폐쇄된 국경선 근처 공항. 오대호를 채울 만큼 쌓인 눈이 새하얀 국경을 이룬다. 모든 여객기가 경유하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겠지만 직항으로 떠난 네 곁은 가장 먼 변방이었다. 비행기는 인접국으로 긴급 우회해 착륙했다. 네가 사는 지역에 몰아친 이번 한파로 수백 명이 고립되었다. 예전에도 비슷한 재난을 겪은 게 떠오른다. 지난날, 내 마음은 얼어 있었다. 그런데 네가 다가와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만년설은 녹기 시작했고,..